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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80

고대사회의 혼인풍습(서옥제, 형사취수제, 민며느리제)이야기 고대사회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혼인풍습 1. 고대사회의 혼인제도 1.1 결혼의 절차 교혼: 결혼을 약속하는 절차로,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혼인 의사를 전달하고, 여자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면 교혼이 성립됩니다. 납채: 남자 측이 여자 측에 혼인 예물을 보내는 절차입니다. 예물에는 금, 은, 비단, 곡식 등이 포함됩니다. 친영: 여자 측이 남자 측에 혼인 예물을 보내는 절차입니다.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납채를 보낸 후, 여자 측에서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친영을 보냅니다. 혼례 : 결혼식을 올리는 절차이며, 혼례는 보통 남자 측에서 여자 측으로 가서 치러집니다. 1.2 결혼의 의식은 축복, 축의, 축사, 축과, 축답례의 순서로 이루어졌습니다. 축복: 결혼을 축하하는 의식으로 부모, 친지, 친구들이 결혼을 축.. 2024. 1. 22.
국조오례의 - 국가의 기본 예식인 오례(빈례, 가례, 군례, 흉례, 길례)를 정리한 법전 조선의 기본예식인 오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 조선의 기본예식에 대한 법전- 국조오례의 국조오례의란 국가의 기본예식인 오례, 즉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에 대해 규정한 예전(禮典)이다. 편찬 경위는 처음 세종이 허조(許稠) 등에게 오례에 관한 것을 저작하도록 명했는데, 허조 등은 고금의 예서(禮書)와 『홍무예제(洪武禮制)』를 참작하고 『두씨통전(杜氏通典)』을 모방하여 편찬에 착수했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였다. 다시 세조가 강희맹(姜希孟) 등에 명하여 오례 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고, 또 도식(圖式)을 붙여 편찬하게 했으나 탈고하지 못하다가 1474년(성종 5)에 신숙주와 정척 등에 의해 완성되었다. 권두에 강희맹의 서문과 신숙주의 「진국조오례의전(進國朝五禮儀箋)」이 있다... 2024. 1. 20.
잊혀진 역사와 궁궐, 경희궁 경희궁의 역사와 복원 경희궁의 역사 경희궁은 조선시대 광해군이 왕기를 얻기 위해 지은 궁궐로, 1617년(광해군 9)에 완공되었다. 경희궁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하여 ‘서궐’로도 불렸으며, 인조반정 이후에는 왕의 이궁으로 사용되었다. 경희궁은 인조, 숙종, 영조, 정조, 헌종, 철종 등 10명의 왕이 임어하였으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 편전인 자정전, 내전인 회상전, 융복전 등이 있었으며, 세자궁, 대비궁, 존현각, 태녕전, 융무당, 집경당, 영취정 등도 있었다. 그러나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면서 경희궁의 많은 전각이 훼철되었다. 이후 경희궁은 폐허로 변하고, 일부 전각은 창고나 양잠장, 군사 훈련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1910년 경희.. 2024. 1. 14.
서민들의 삶을 화폭에 담은 화가 " 단원 김홍도" 조선후기, 시대상을 반영한 화가 김홍도 1. 단원 김홍도에 대한 소개 1.1 김홍도의 생애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산수, 인물, 풍속, 도석, 불화, 화조, 초충 등 회화의 모든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특히 풍속화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작품들이 유명하다. 김홍도는 1745년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강세황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으며, 20대 초반에 이미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1773년에는 영조와 정조의 초상을 그려 명성을 얻었고, 1781년에는 종6품인 안기찰방에 임명되었다. 강세황의 지도를 받아 20대 때부터 화단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영조와 정조의 어진화사로 임명되어 왕실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신선.. 2024. 1. 9.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 한중록 피와 눈물로 쓴 기록, 한중록과 혜경궁홍씨 혜경궁 홍씨의 생애 혜경궁 홍씨는 1735년(영조 11)에 태어나 1744년(영조 20)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다. 1750년에 첫째 아들을 낳았으나 3세에 죽었고, 그해 가을에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훗날 조선의 22대 왕이 되는 정조였다. 정조는 1759년(영조 35)에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당시 아버지인 장헌세자와 할아버지인 영조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1762년(영조 38)에 장헌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혜경궁 홍씨는 폐서인이 되어 정조와 함께 궁을 떠나 친정으로 갔다. 그러나 영조는 장헌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세자의 지위를 회복시켰으며, 동시에 혜경궁 홍씨에게도 혜빈(惠嬪)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2달여 후에 정조는 .. 2024. 1. 4.
조선의 여장부, 정희왕후 조선의 완성을 꿈꾼 여걸 정희왕후 정희왕후의 삶과 죽음 정희왕후는 세조의 왕비로,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킨 뒤 왕위를 찬탈하면서 크게 출세했습니다. 세종과 소헌왕후에게는 순종적이고 바른 몸가짐으로 총애를 받았으며, 세조 역시 그녀를 매우 아꼈습니다. 그러나 세 자녀 중 두 명은 어린 나이에, 한 명은 성년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종이 즉위한 뒤 왕대비가 되었으나, 예종이 갑자기 죽자 손자인 잘산군(성종)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신하들과 의논하면서 성종에게 조언을 주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으며, 성종의 정통성을 위해 아들을 왕으로 추증하고, 며느리를 비보다 높은 지위로 올려주었습니다. 성종이 20세가 되기 전까지 수렴청정을 했지만, 실제로는 성종이..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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