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완성을 꿈꾼 여걸 정희왕후
정희왕후의 삶과 죽음
정희왕후는 세조의 왕비로,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킨 뒤 왕위를 찬탈하면서 크게 출세했습니다. 세종과 소헌왕후에게는 순종적이고 바른 몸가짐으로 총애를 받았으며, 세조 역시 그녀를 매우 아꼈습니다. 그러나 세 자녀 중 두 명은 어린 나이에, 한 명은 성년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종이 즉위한 뒤 왕대비가 되었으나, 예종이 갑자기 죽자 손자인 잘산군(성종)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신하들과 의논하면서 성종에게 조언을 주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으며, 성종의 정통성을 위해 아들을 왕으로 추증하고, 며느리를 비보다 높은 지위로 올려주었습니다. 성종이 20세가 되기 전까지 수렴청정을 했지만, 실제로는 성종이 대부분의 직무를 스스로 처리했습니다. 그녀는 안정된 상태에서 왕권을 넘겨주기 위해 기다렸으며, 그동안 권력을 누리던 인물들은 하나씩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나서는 정사에 관여하지 않고 노후를 보냈으며, 1483년에 온양행궁에서 독감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약: 정희왕후는 세조의 왕비로, 세종과 소헌왕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세 자녀를 모두 앞서 보내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예종이 죽자 손자인 성종을 왕위에 올리고,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그녀는 성종의 정통성을 위해 노력하고, 안정된 상태에서 왕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그 후에는 정사에 관여하지 않고 노후를 보내다가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1
언니를 제치고 대군과 혼인한 11살, 꼬마
정희왕후는 고려시대부터 명문가를 자랑하던 파평윤씨 가문의 딸로 1418년에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고려 말 판도판서를 지낸 윤승례이고 아버지 윤번은 음보로 관직에 나가 신천 현감을 거쳐 정희왕후 10여세 무렵에는 군기시 판관 자리에 있었다.
정희왕후는 윤번의 둘째 딸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원래 왕실과 혼담이 오가던 것은 그녀의 언니였다고 한다. 당시 세종은 자녀들의 결혼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고, 대군과 공주의 결혼에도 정식 간택 절차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관여하여 훌륭한 배필을 맞아주려고 노력했다. 윤번의 집 큰 딸을 둘째 아들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의 배필로 점찍고 궁중의 보모상궁과 감찰상궁을 파견한 세종은, 큰딸보다 둘째 딸의 자태가 더 비범하고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둘째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바로 훗날 조선 7대왕이 되는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이다.
정희왕후는 1428년 11세의 나이에 한 살 연상의 수양대군과 혼례를 올리고 왕실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는 문종이 이미 세자의 자리를 탄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군 즉, 왕자의 아내였던 그녀에게 왕비는 거의 생각할 수도 없는 자리였다. 그녀는 수양대군의 아내가 되면서 낙랑대부인에 봉해졌다. 수양대군과는 슬하에 2남 1녀(장남 의경세자. 차남 예종. 딸 의숙공주)를 두었다. 수양대군은 왕자시절 정희왕후 외에 딱 한명의 첩을 들였는데 그녀는 훗날 근빈 박씨가 된다. 근빈 박씨가 사육신 박팽년의 누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당시 조선의 상류층 남자라면 당연시되었던 축첩(蓄妾)행위를 그다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수양대군과 정희왕후의 사이는 꽤 좋았던 것 같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수양대군은 뛰어난 학자였지만 병약했던 형 문종에 비해 문무를 모두 겸비한데다 야망도 큰 인물이었기에, 아버지 세종은 둘째 아들이 훗날 왕권에 도전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까 매우 염려하였다고 한다. ‘수양대군’이란 이름도 수양산에서 충절을 지킨 백이와 숙제의 고사를 생각해서 임금에 대한 충성을 변치 말라는 뜻에서 세종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둘째 아들의 야심을 꿰뚫어본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세손(훗날의 단종)을 보필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세조의 든든한 조력자, 정희왕후
수양대군은 세종과 문종의 유지로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 와 황보인을 비롯한 신하들이 어린 왕을 함부로 휘두르며 왕권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동생이지만 라이벌이기도 했던 안평대군의 왕권경쟁에 참여한 듯한 애매한 태도도 수양대군의 마음을 급하게 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과 세력을 형성하여 안평대군과 손잡은 재상들(김종서 황보인 등)과 맞섰다.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년 계유년) 10월 10일 자신의 쿠데타를 ‘나라가 처한 위태로운 재난을 평정한다’는 의미인 정난(靖難)으로 미화시켜 거병했다. 그러나 이 계유정난은 정희왕후의 결단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일지도 몰랐다.
정희왕후는 남편의 왕권에 대한 야심을 늘 걱정하고 이를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남편의 결심이 굳어진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날짜가 정해지자 그녀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심지어는 정난을 일으키기로 한 아침, 정보가 안평대군 쪽으로 넘어가 거병할 것을 망설이는 수양대군을 독려하여 손수 갑옷을 입혀 말 위에 오르게 한 것이 바로 정희왕후였다. 계유정난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급습하여 죽이고 안평대군을 유배보내 죽임으로써 수양대군의 승리로 끝났다.
적이 사라진 중앙 정치무대에서 거칠 것이 없어진 수양대군은 바로 왕이 되는 일에 착수했다. 정난에 성공한지 2년 만에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를 상왕으로 올리고 왕위를 꿰차 조선의 7대 임금 세조가 되었다. 그의 부인 정희왕후도 왕비자리에 올랐다. 이후 상왕으로 올렸던 단종을 사육신이 일으킨 복위 운동을 빌미 삼아 1457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유배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1457년 서인으로 강등된 단종이 영월에서 자살하도록 만듦으로써 세조는 자신이 찬탈한 왕위를 지켜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세조를 격려하고 조언하며 그를 도운 사람이 바로 정희왕후였다.
자식과 남편을 먼저 보낸 왕비이자 어머니
명분이 취약한 자가 권력을 잡으면 그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공포정치를 하기 마련이다. 세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카와 남동생,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벗들의 피를 손에 묻힌 세조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오른 왕위에 겨우 14년간 머물렀다. 그동안 그는 다음 왕위를 이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큰아들 의경세자가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극심한 죄의식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정희왕후도 마찬가지였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침을 뱉는 꿈을 꾼 뒤 피부병에 시달리게 된 세조를 간호하면서 정희왕후 또한 큰아들 의경세자의 죽음이 예사 죽음이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죄값을 치르는 것이라 여겼고, 죄의식을 털어버리기 위해 불교에 매달렸다.
그러나 정희왕후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편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둔 뒤 다음 왕위를 이은 둘째 아들 예종마저 재위 1년 2개월 만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죽여가며 차지했던 왕권이 허무하게 사라져가는 것을 정희왕후는 그대로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성종의 든든한 버팀목, 할머니 정희왕후
정희왕후는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이라는 공식적인 정치 행위를 한 여인으로, 왕권을 안정시키고 사회를 정돈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녀의 수렴청정은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떤 정책을 추진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정희왕후는 세조가 죽고 예종이 갑작스런 사망으로 왕위를 물려준 후, 자신의 둘째 손자인 자산군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뒤에 발을 치고 수렴청정을 하여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수렴청정이란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비가 어린 왕을 끼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왕과 신료들과의 직접 대면을 피하기 위해 발을 쳐서 커튼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정희왕후는 1469년부터 1476년까지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조선의 최고정책결정권자가 되었습니다.
[정희왕후에게 수렴청정을 해달라 부탁하는 대신들] - 성종실록의 기롣
신숙주 등이 굳이 이를 청하고, 이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전략) 사왕(嗣王)이 나이가 어리니 온 나라 신민은 허둥지둥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자성왕대비전하(정희왕후)께서는 슬픈 정리를 조금 억제하시고, 종사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시어 (중략) 모든 군국의 기무를 함께 들어 재단하여 사군(성종을 이름)이 능히 스스로 정사를 총람하기를 기다려 환정(還政)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대비(大妃)가 이를 허락하였다.
[성종실록] 1권, 즉위년(1469 기축) 11월 28일(무신)
[정희왕후의 업적]
- 종친 정리: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종친들이 많은 관직과 특혜를 받았습니다. 정희왕후는 이러한 종친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종친의 관리 등용을 법으로 금지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신분의 평등을 추구했습니다. 단종은 복권하지 않았지만 그의 비 정순왕후 송씨를 신원하여 단종에 대한 죄의식을 어느 정도는 상쇄하려 하였다.
- 숭유억불: 조선의 국시인 숭유억불은 유교를 국가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입니다. 정희왕후는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신봉했지만, 정책면에서는 숭유억불을 강화시켰습니다. 불교의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에 사 찰을 폐지하였으며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했습니다. 이는 불교의 부패와 탐욕을 규탄하고, 유교의 도덕과 의리를 강조 하는 데 있었습니다.
- 농업과 잠업 육성: 정희왕후는 농업과 잠업을 국가의 기본산업으로 보고, 이를 육성하였습니다. 농업은 농민의 생활을 개선하고, 재정을 보강하기 위해 농기구와 농법을 개선하였습니다. 잠업은 해상무역을 활성화하고, 외국과의 교류를 증진하기 위해 육성하였습니다. 이는 조선의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정희왕후의 이러한 정치를 도운 것은 세조의 근신이던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엄청나게 큰 정치, 경제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훗날 새롭게 정계에 들어오게 되는 사림들의 주요한 비판 대상이 되어 갈등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단성있고 노련했던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조선의 왕권은 안정을 되찾았고 사회는 정돈되어 갔습니다. 이것은 이후 성종의 친정기에 문물제도가 완성되는 주춧돌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20세가 되는 해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그녀는 세조가 거둥(擧動)하던 온양온천에 자주 내려가 있었고 죽음도 온양에서 맞이하였습니다. 그녀는 조선의 역사에 빛나는 여성 정치가로 기억됩니다.
온양행궁 터에 남은 신정비
세조가 온양에 머물렀을 때 샘이 솟아나온 상서로운 일들을 적은 비석이다.
비문 앞면애 의하면 세조 10년(1494) 속리산 복천사에 순행하며 혜각존자를 만나고 3월 1일 온양에
머물렀는데 4일만에 갑자기 샘물이 뜰에 솟아 넘치므로 왕이 명하여 우물을 파보니 물이 차고 맑았으며 맛이 달고
수질이 부드러웠다. 이를 상서롭게여겨 팔도에 표문을 올려 하례칭송하니 주필신정(駐蹕神井)이라 하였다.
또 비문 뒷면에 의하면 성종14년(1483) 대행대비 자성대비가 금년 2월에 두 왕대와 같이 온양에 와보니 신정은
그대로 있으나 비가 망가졌으므로 내수사의 재물로써 비를 세우로독 명하였다고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 비가 세워진 것은 성종14년(1483년)의 3월에 일러 임원준이 짓고 이숙함이 썻다.
이 내용을 보면 온양은 온천 뿐만 아니라 찬물이 솟아 나오는 냉천(冷泉)으로도
유명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마무리
가족의 중심이자 든든한 버팀목인 어머니와 아버지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역할을 되새겨보게 하는 정희왕후의 이야기입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어머니이자 아내로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어떤 자세로 임해야하는지 자녀교육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모습인지 역사를 통해 교훈으로 삼고 배우며 익혀야 하겠습니다.
훌룡한 어머니가 있어 훌률한자식이 난다는 말이 있듯 어머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로하여금 깨닫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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