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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인물이야기(고대~근현대)

근대화를 꿈꾼 개혁 군주, 고종

푸름이j 2023. 12. 24.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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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대원수복 착용사진

 황제 고종이야기 

 

 

고종어진
황룡포를 학용한 고종황제어진

 

 

고종의 생애와 즉위과정

 

 

1852725,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출생

18631213, 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26대 왕으로 즉위

즉위 당시 나이 12세로,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흥선대원군이 조대비를 도와 정치를 주도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민씨 척족들이 정권을 장악

189710,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칭함

고종의 주요 업적

 

개화 정책의 추진: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수신사 파견, 관제와 군제의 개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화 정책을 추진

대한제국의 수립: 조선의 자주국임을 선포하고, 근대적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됨

 

 

황제국의 선포

18971012일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국호를 대한국(大韓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고종은 1882년부터 사용하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로 정하고, 국장을 이화문(李花紋)으로 하였으며, 애국가(愛國歌)를 국가로 하였다.

 

대한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한층 강하게 표방하고자 사용된 의례상·의전상 국호로, 대한제국의 국명은 대한(大韓)’이다. 대한이라는 말은 '삼한(三韓)'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를 통틀어서 삼한이라 불렀는데, 그 삼한이 통일되었다는 의미에서 대한이라 한다.

 

여기서 대한제국의 국호의 어원을 설명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마한, 진한, 변한은 4세기 이전 한반도 남부의 삼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10세기의 후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를 가리킨다. 뒷 문장에 마한, 진한, 변한이 고려에 이르러서 통합되었다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호를 변경하면서 제국이라고 선포하였기에 ’()가 더해져 대한제국이 되었다. 대한이라는 이름은 19194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는 취지로 국호로 재사용했고, 19488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 그대로 이어졌다.

 

 

국호 대한에 관한 실록 기록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이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 장예원 경(掌禮院卿) 김영수(金永壽)이다.】

 

상이 이르기를,

"경 등과 의논하여 결정하려는 것이 있다.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는 지금에 모든 예(禮)가 다 새로워졌으니 원구단(圜丘壇)에 첫 제사를 지내는 지금부터 마땅히 국호(國號)를 정하여 써야 한다. 대신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옛날에 봉(封)해진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그대로 칭호로 삼았는데 애당초 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나라는 오래되었으나 천명이 새로워졌으니 국호를 정하되 응당 전칙(典則)에 부합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삼대(三代) 이후부터 국호는 예전 것을 답습한 경우가 아직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바로 기자가 옛날에 봉해졌을 때의 칭호이니, 당당한 황제의 나라로서 그 칭호를 그대로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대한’이라는 칭호는 황제의 계통을 이은 나라들을 상고해 보건대 옛것을 답습한 것이 아닙니다. 성상의 분부가 매우 지당하니, 감히 보탤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告由祭)의 제문과 반조문(頒詔文)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하였다.

—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1897년) 10월 11일 양력 3번째기사
 

대한제국 국기와 문장

 

태극기 이미지
대한제국의 국기

 

 

여러 문장 소개 이미지
대한제국의 문장

 

 

고종의 마지막

고종은 1919121일 오전 6시경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로 사망했다. 고종의 공식적 사인은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이지만, 아직까지 고종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고, 3 · 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묘소는 홍릉이다.

 

고종의 근대화 정책

고종의 개혁 정책은 대한제국의 수립과 광무개혁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수립은 1897년에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꾼 것입니다. 광무개혁은 1897년부터 1903년까지 이루어진 근대적 개혁으로, 옛것을 근본으로 새로운 것을 참조한다는 구본신참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광무개혁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식산흥업정책: 근대적 경제체제 건설을 위해 황실 재정 담당 기관인 내장원을 설치하고, 산하에 통신사, 철도원, 광학국, 수륜원 등을 두어 산업과 통신을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신식군대를 창설하고, 공장과 은행 및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법제개혁: 교전소와 법규교정소를 설치하여 신법과 구법을 참고하여 새로운 전식을 만들었습니다. 1899년에는 대한국국제를 반포하였습니다.

 

교육개혁: 신교육을 보급하고 해외 유학생을 파견하였습니다. 1895년에는 서울외국학교를 설립하였고, 1899년에는 국립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문화개혁: 근대적 문화를 도입하고 전통문화를 보존하려 했습니다. 1898년에는 박문원을 설치하여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였고, 1900년에는 국립박물관을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전국의 토지 측량을 실시하고 모든 관리들에게 양복을 입도록 하고 단발령을 재개하였습니다.

 

고종의 개혁 정책은 대한제국을 근대 국가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었으나, 일본의 간섭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고종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고종은 1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사망했는데,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설이 있는 반면, 그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다.

 

고종의 시신을 염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시신이 사후 1~2일 밖에 안되었을때도 심하게 부풀어져있었고 이가 이미 다 빠져있는 등 부패가 정상인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부분은 독극물 중독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1]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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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일기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 10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와 한진창에 의하면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30센티 미터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1]고 했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했다.

 

3.1 만세운동의 도화선이된 고종의 죽음

고종의 죽음은 당대에 크게 떠돌아 전국적인 규모의 3·1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19년의 3·1 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인 191933일에 맞추어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일제강점기인 1945년까지는 이를 조사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그 이후로도 공식 조사된 바 없어 명확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고종은 당시 67세로 적지 않은 연령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종은 당시 상당히 건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강제로 양위를 당한 고종이 의병이나 독립 운동 세력에게 상징적 구심점이어서, 독립을 위한 무장봉기를 계획하여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신한혁명단에서 고종황제를 망명시켜서 항일운동을 활성화할 계획도 드러나는 등 일제에게는 부담이 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사실일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되고 있다. 더구나 고종황제는 덕수궁에서 망국의 한을 씹으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액의 내탕금으로 지원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독살설이 사실일 경우 관련자로서 거론되는 인물은 이완용, 이기용, 한창수, 윤덕영, 민병석, 한상학 등이 있으며, 어의인 안상호도 의심을 받고 있다. 이중 이완용과 이기용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친일파들로서 특히 이완용은 일본 천황 앞에서 고종을 독살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설이 있으며, 독을 탄 음료를 고종에게 직접 전한 궁녀는 일제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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