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눈물로 쓴 기록, 한중록과 혜경궁홍씨
혜경궁 홍씨의 생애
혜경궁 홍씨는 1735년(영조 11)에 태어나 1744년(영조 20)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다. 1750년에 첫째 아들을 낳았으나 3세에 죽었고, 그해 가을에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훗날 조선의 22대 왕이 되는 정조였다.
정조는 1759년(영조 35)에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당시 아버지인 장헌세자와 할아버지인 영조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1762년(영조 38)에 장헌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혜경궁 홍씨는 폐서인이 되어 정조와 함께 궁을 떠나 친정으로 갔다.
그러나 영조는 장헌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세자의 지위를 회복시켰으며, 동시에 혜경궁 홍씨에게도 혜빈(惠嬪)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2달여 후에 정조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와 정조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1764년(영조 40)에 정조는 영조의 첫째 아들인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되었다. 이로써 혜경궁 홍씨는 더 이상 왕세자의 어머니가 아니라, 장헌세자의 세자빈으로서만 머물게 되었다.
혜경궁 홍씨의 삶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왕세자빈 시절로, 이 시절에는 남편인 장헌세자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두 번째는 폐서인 시절로, 이 시절에는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많은 고난을 겪었다. 세 번째는 왕세손빈 시절로, 이 시절에는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삶을 회고한 『한중록』을 남겼는데, 이 책은 조선 후기의 역사와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 그리고 죽음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화평옹주의 죽음 이후 시작되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선위교서를 내리며 세자가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경종의 독살설을 잠재우기 위한 ‘결백증명쇼’였고, 세자는 영조의 진심을 알지 못했다. 영조와 세자의 갈등은 점점 심해져갔고, 세자는 울화증을 앓게 되었다.
세자빈 홍씨는 시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갈등에 휩싸였다. 친정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세자빈 홍씨는 더욱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영조는 세자에게 공공연히 면박을 주었고, 세자의 울화증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세자는 내시 김한채를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세자의 생모 선희궁은 세자의 살기가 부친마저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영조에게 세자의 행태를 모두 밝혔다. 세자빈 홍씨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버렸고, 사도세자는 결국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개인적인 문제로만 보기 어려운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경종의 독살설, 노론과 소론의 당쟁, 영조의 불안정한 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도세자의 비극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피와 눈물로 쓴 기록, 한중록 (恨中錄)에 대한 소개
한중록은 조선 22대 왕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가 쓴 일대기이다.
1795년부터 1805년까지 10년에 걸쳐 4차례에 걸쳐 완성되었다.
내용
제1편: 혜경궁 홍씨의 출생과 성장,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 후의 궁중 생활,
정조를 출산한 일, 친정 집안의 몰락 등을 기록하였다.
제2편: 순조 즉위 후 친정 집안이 홍국영의 모함으로 몰락한 사실을 소상하게 밝히고 사면을 호소하였다.
제3편: 임오화변으로 겪은 비통함과 더불어 부친 홍봉한은 이와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고, 아
들 정조의 효행과 외할아버지의 충절에 대한 의리를 언급하였다.
제4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의 전말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특징
혜경궁 홍씨가 직접 겪은 일들을 순 한글의 유려한 문장으로 묘사한 파란만장한 일대기이다.
등장인물의 성격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조선 여성의 이면사와 당시의 정치풍토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의의
조선 후기의 역사와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여성의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혀 준다.
평가
한중록은 조선 후기의 역사와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조선 여성의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혀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친정 집안을 신원하기 위해 쓴 글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목적이 강하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가 직접 겪은 일들을 생생하게 기록한 만큼, 조선 후기의 역사와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한중록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삶과 죽음
'한중록'에는 "이때 소조(小朝·사도세자)의 의대 병환이 극하시니, 그 어인 일인고. 의대 병환이야말로 더욱 형용할 수 없는 괴질이니, 대저 옷을 한 가지나 입으시려면 열 벌 혹은 이삼십 벌이나 지어 놓아도 귀신인지 무엇인지를 위하여 불태우시기도 하니라. …이때 시중드는 이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사람이 다치니, 이 아니 망극한 병환이 아니냐"면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1762년 윤5월 영조는 세자를 창경궁 문정전 앞으로 불렀다. 자결을 명하였다가 신하들이 만류하자 뒤주에 들어가도록 했고, 사도세자는 8일 만에 목숨을 잃었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혜경궁은 정조를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한중록'에는 "오빠가 들어오셔서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드셨다 하니, 빈궁도 더 대궐에 못 있을 것이라. 위에서 본집으로 나가라 하신다. …서로 붙들고 통곡하노라"라고 하여 참담했던 그날을 기록하고 있다. 다행히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다음 날인 21일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한다면서, 세자의 호를 회복시켜 주었다.
한중록(恨中錄) 과 읍혈록(泣血錄)
‘혜경궁읍혈록’, 권수제는 ‘읍혈녹’으로 모두 한글로 표기하였다. 서문에 따르면, 가보로 보관할 만한 필적을 내려달라는 맏조카 홍수영(洪守榮, 1755~1798)의 부탁에 화답해 지은 것이라 한다. ‘읍혈록(泣血錄)’이란 제목은 정조가 이 책을 읽고 피눈물을 흘린 것을 본 혜경궁 홍씨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한중록』, 『한중만록』으로 불리기도 한다. 효의왕후, 순원왕후, 신정왕후에게 전해지다가 1830년(순조30) 화재로 없어졌는데, 영성위(永城尉) 신광유(申光綏)의 집에서 발견되어 다시 대궐로 들여와 보관되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혜경궁 홍씨의 탄생부터 세자빈 간택,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화변 등 주요 사건을 시간에 따라 기술했고,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의 봉수당에서 잔치를 연 일로 서술을 끝맺었다. 후반부에는 일가친척에 대한 신상을 개별적으로 서술했는데, 가족뿐 아니라 입궐할 때 데리고 온 종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아사미문고에 있는 국한문본 『보장(寶藏)』 1책, 한글본 『보장(寶藏)』 1책과 모두 동일하다. 다만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기록 말미에 “자세한 내용은 『한듕만록』에 있다.”라는 서술이 있어 특기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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