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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인물이야기(고대~근현대)

신사임당과 조선시대 여인들의 삶

푸름이j 2024. 1. 3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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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랑 이종상 화백이 그린 신사임당 초상화 5만원권 지폐의 초상화이다.

 

 

 

1. 조선시대 여인들이 지켜야 할 규범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조선시대 여인들은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에 따라 살았다. 이는 결혼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 후에는 남편을, 남편이 돌아가면 자식을 따르는 규범을 의미한다. 또한, 칠거지악은 남편의 일방적인 의사표시로 이혼이 가능한 7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칠거지악의 이유]

  1.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음
  2. 자식이 없음
  3. 음탕함
  4. 질투함
  5. 나쁜 병이 있음
  6. 비방중상
  7. 도둑질을 함

칠거지악에 해당하는 경우라도 세가지 특별한 상황에서는 이혼이 허용되지 않았다.

  • 내쫓아도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
  •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른 경우
  • 전에 가난하였으나 혼인 후 부자가 된 경우

 

2. 시기별 여인들의 삶

 

2.1  조선 전기 (1392~1600)

 

조선 전기의 여인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의 영향은 있었지만 여성의 교육과 사회 참여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여성들은 가정교육을 받아 시, 서, 화, 음악 등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시문집을 남기거나 관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2.2 조선 중기 (1600~1750)

조선 중기의 여인들은 유교적 여성관의 영향으로 가정 내에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여성들은 주로 가정에서의 역할에 집중하고, 자녀교육과 가정 살림을 책임지는 역할을 수행했다.

2.3 조선 후기 (1750~1910)

조선 후기의 여인들은 유교적 여성관이 더욱 강화되어 가정 내 역할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여전히 가정교육을 통해 자녀교육에 힘을 썼고, 가정 살림과 자녀 양육을 중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4 조선시대 여인들의 삶의 특징

  • 가부장적 사회 구조
  • 유교적 여성관
  • 여성의 교육과 사회 참여 (전기는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중기와 후기에 제한)

 

2. 신사임당의 생애

신사임당은 1504년 12월 5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진사 신명화이고,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이사온의 따님이었다.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7살 때 세종 시대의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따서 그림을 그렸고, 어릴 때부터 시를 지었고, 글씨도 잘 썼다.

1522년, 18세의 나이에 이원수와 결혼하여 5남 1녀를 두었다. 결혼 후에도 시와 그림, 글씨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신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2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신사임당은 결혼 후에도 시와 그림, 글씨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특히 그림에 뛰어났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리도」, 「초충도」, 「노안도」 등이 있다. 「자리도」는 그의 딸이었던 이매창이 어머니의 그림을 보고 그린 그림으로, 신사임당의 그림솜씨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신사임당은 또한 뛰어난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에는 여성으로서의 삶과 자녀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연에 대한 감상이 잘 드러나 있다. 신사임당은 1551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2.1 신사임당의 대표작 [초충도]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다양한 풀과 벌레를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8폭으로 구성된 작품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한국 회화의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초충도 그림
8폭의 초충도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조선시대 여성 화가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한국 회화의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8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왼쪽부터 차례대로 원추리와 개구리(6), 여뀌와 사마귀(8), 맨드라미와 쇠똥벌레(5),

어숭이와 개구리(7), 양귀비꽃과 도마뱀(4), 오이와 개구리(3), 가지와 방아깨비(2), 수박과 들쥐(1)가 있다.

 

2.2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와의 일화

이원수와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신사임당의 삶은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뛰어난 여성의 자존심과 의지를 보여준다. 남편의 말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유지한 모습은 그녀의 강인한 성격을 드러낸다.

 

사임당: "제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십시오. 우리가 7남매(43)나 두었으니까 더 구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기>의 교훈을 어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원수: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이오?"

 

사임당: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에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동거하지 않았다 뿐이지, 아주 나타나게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원수: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사임당: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공양하는 도리에 어김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해서, 새장가를 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원수: "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 같은 일이 없소?"

 

사임당: "주자가 47살 때에 부인 유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들지 않아 살림을 할 사람이 없었지만, 주자는 다시 장가들지 않았습니다."

 

과연 남편의 말에 순응하기만 했던 수동적인 여성이었는지 상당히 의문이 들게 만드는 대목. 하지만 남편 이원수는 이 말을 무시하고 장남 이선과 연배가 비슷했던 주막집 여자 권씨를 신사임당 생전에 첩으로 삼았고, 신사임당이 죽자 권씨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았다. 이후 이선과 새어머니 권씨는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싸웠을 정도였고, 3남 이이는 어머니의 탈상 후 이원수에게 말도 하지 않고 금강산으로 출가해버렸다.

 

3. 평가

신사임당은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서 뛰어난 재능과 덕성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업적은 여성들에게 예술적인 발전의 기회를 제공하고, 자녀교육에도 힘을 썼다. 그녀의 삶과 업적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결론

조선시대 여인들은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살았지만, 신사임당과 같은 여성들은 자신의 능력과 열정을 발휘하여 한계를 뛰어넘었다. 그들의 삶과 업적은 오랜 세월 동안 간과되었지만, 최근의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여인들의 역사적 위상이 재조명되고 있다.

 

참고영상 - KBS 역사스페셜 - 조선시대 여인들은 어떻게 살았나?

https://youtu.be/D2shaO5jp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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