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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과 조선시대 여인들의 삶 1. 조선시대 여인들이 지켜야 할 규범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조선시대 여인들은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에 따라 살았다. 이는 결혼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 후에는 남편을, 남편이 돌아가면 자식을 따르는 규범을 의미한다. 또한, 칠거지악은 남편의 일방적인 의사표시로 이혼이 가능한 7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칠거지악의 이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음 자식이 없음 음탕함 질투함 나쁜 병이 있음 비방중상 도둑질을 함 칠거지악에 해당하는 경우라도 세가지 특별한 상황에서는 이혼이 허용되지 않았다. 내쫓아도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른 경우 전에 가난하였으나 혼인 후 부자가 된 경우 2. 시기별 여인들의 삶 2.1 조선 전기 (1392~1600) 조선 전기의 여인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 2024. 1. 30.
중명전, 덕수궁의 역사적인 보석 외교권을 박탈당한 장소, 덕수궁 중명전 1. 중명의 의미와 혼동 중명(重眀)이란 말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 또는 '거듭하여 밝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 이름은 《주역(周易)》의 이괘(離卦)에서 유래되었지만, 망국을 알리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는 역사적인 맥락에서는 모순적으로 여겨집니다. 이에 관한 여러 이야기와 혼동을 다뤄보겠습니다. 1.1 '명'자의 특이한 표기 특이하게 '명'자를 흔히 '밝을 명' 자로 쓰는 '明'이 아닌 '眀' 자로 쓰였습니다. '眀'은 '밝게 볼 명'으로도 불리며, '明'과는 다르게 '눈 목(目)'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는 여러 가설을 낳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일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2 여러 가설의 해석 이 이름에 대한.. 2024. 1. 25.
7년간의 전쟁의 기록, 난중일기(亂中日記) 7년간의 전쟁,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난중일기(亂中日記) 1.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소개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 7년(1592년~1598년) 동안 군중에서 쓴 일기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76호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일기 7책과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까지 총 9권이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고, 2013년 6월 18일 광주에서 열린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의 권고를 유네스코가 받아들여,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이순신 난.. 2024. 1. 24.
고대사회의 혼인풍습(서옥제, 형사취수제, 민며느리제)이야기 고대사회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혼인풍습 1. 고대사회의 혼인제도 1.1 결혼의 절차 교혼: 결혼을 약속하는 절차로,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혼인 의사를 전달하고, 여자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면 교혼이 성립됩니다. 납채: 남자 측이 여자 측에 혼인 예물을 보내는 절차입니다. 예물에는 금, 은, 비단, 곡식 등이 포함됩니다. 친영: 여자 측이 남자 측에 혼인 예물을 보내는 절차입니다.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납채를 보낸 후, 여자 측에서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친영을 보냅니다. 혼례 : 결혼식을 올리는 절차이며, 혼례는 보통 남자 측에서 여자 측으로 가서 치러집니다. 1.2 결혼의 의식은 축복, 축의, 축사, 축과, 축답례의 순서로 이루어졌습니다. 축복: 결혼을 축하하는 의식으로 부모, 친지, 친구들이 결혼을 축.. 2024. 1. 22.
국조오례의 - 국가의 기본 예식인 오례(빈례, 가례, 군례, 흉례, 길례)를 정리한 법전 조선의 기본예식인 오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 조선의 기본예식에 대한 법전- 국조오례의 국조오례의란 국가의 기본예식인 오례, 즉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에 대해 규정한 예전(禮典)이다. 편찬 경위는 처음 세종이 허조(許稠) 등에게 오례에 관한 것을 저작하도록 명했는데, 허조 등은 고금의 예서(禮書)와 『홍무예제(洪武禮制)』를 참작하고 『두씨통전(杜氏通典)』을 모방하여 편찬에 착수했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였다. 다시 세조가 강희맹(姜希孟) 등에 명하여 오례 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고, 또 도식(圖式)을 붙여 편찬하게 했으나 탈고하지 못하다가 1474년(성종 5)에 신숙주와 정척 등에 의해 완성되었다. 권두에 강희맹의 서문과 신숙주의 「진국조오례의전(進國朝五禮儀箋)」이 있다... 2024. 1. 20.
잊혀진 역사와 궁궐, 경희궁 경희궁의 역사와 복원 경희궁의 역사 경희궁은 조선시대 광해군이 왕기를 얻기 위해 지은 궁궐로, 1617년(광해군 9)에 완공되었다. 경희궁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하여 ‘서궐’로도 불렸으며, 인조반정 이후에는 왕의 이궁으로 사용되었다. 경희궁은 인조, 숙종, 영조, 정조, 헌종, 철종 등 10명의 왕이 임어하였으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 편전인 자정전, 내전인 회상전, 융복전 등이 있었으며, 세자궁, 대비궁, 존현각, 태녕전, 융무당, 집경당, 영취정 등도 있었다. 그러나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면서 경희궁의 많은 전각이 훼철되었다. 이후 경희궁은 폐허로 변하고, 일부 전각은 창고나 양잠장, 군사 훈련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1910년 경희.. 2024.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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