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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근현대(인물과 유적지)

중명전, 덕수궁의 역사적인 보석

by 푸름이j 2024.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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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중명전 모습 사진
복원된 중명전

 

 외교권을 박탈당한 장소, 덕수궁 중명전

 

1. 중명의 의미와 혼동

중명(重眀)이란 말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 또는 '거듭하여 밝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 이름은 주역(周易)의 이괘(離卦)에서 유래되었지만, 망국을 알리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는 역사적인 맥락에서는 모순적으로 여겨집니다. 이에 관한 여러 이야기와 혼동을 다뤄보겠습니다.

 

1.1 ''자의 특이한 표기

특이하게 ''자를 흔히 '밝을 명' 자로 쓰는 ''이 아닌 '' 자로 쓰였습니다. '''밝게 볼 명'으로도 불리며, ''과는 다르게 '눈 목()'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는 여러 가설을 낳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일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2 여러 가설의 해석

이 이름에 대한 여러 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일제가 ''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을 대신썼다는 주장과, 반대로 대한제국 정부에서 ''이 들어간 ''대신 ''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사실이 아닙니다. ''''의 이체자로, 대한제국 이전부터 쓰이던 한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거짓 정보에 속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2. 덕수궁 중명전의 역사

 

2.1 조선 말 대한제국 시기

원래 덕수궁 궁역은 1884년에 미국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곳은 초기에는 선교사들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나중에는 여성 교육기관인 정동여학당의 건물로 변모했습니다. 1897년에는 정동여학당이 덕수궁으로 이전되면서 수옥헌이라는 서양식 도서관이 설립되었습니다.

수옥헌 사진
1899년의 수옥헌(중명전) 사진

 

 

1901년에는 불의 여파로 수옥헌이 불탔지만, 이후 일본의 건축기사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의 설계로 중명전으로 재건되었습니다.

 

2.2 일제강점기

중명전 사진
오다 쇼고가 지은 < 덕수궁사>에 실린 중명전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중명전은 덕수궁 궁역에서 분리되었고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재건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2.3 광복 이후~현재

복원전 중명전의 모습
광복이후 복원 전 중명전의 모습

 

 

1945년 광복 이후에는 국가 소유로 관리되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군과 공산당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대한민국 정부로 돌아와 1963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중명전 사용권을 이양하여 이후 민간에 넘어갔습니다.

2006년에는 문화재청에 의해 소유되어 역사적인 가치를 중시하며 복원되어 2010년에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이후 2017년에는 역사적 가치를 재인식하며 보수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중명전은 민간에 재공개되었습니다.

 

 

3. 현재 복원된 중명전 관람

현재는 을사조약 및 대한제국 국권회복을 위한 전시관으로 사용한다.

 

1

1‘'덕수궁과 중명전'

 

1전시실 내부 모습
제1전시실 사진

 

덕수궁과 정동 일대를 축소 모형으로 제작하고 그 위에 영상을 투사하여 개항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명전과 덕수궁 권역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2'을사늑약의 현장',

2전시실 내부 모습
제2전시실 사진

 

당시 의복을 고증해 입힌 극사실 인물모형들을 사용해 을사조약 체결 장면을 재현함으로써 체결 현장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이근택의 복장에 고증 오류가 있는데, 부장 상복의 카라에는 별이 2개가 아닌 3개가 있어야 한다.

 

3'을사조약 전후의 대한제국',

3전시실 내부모습
제3전시실 사진

 

을사조약 체결 전후로 숨가쁘게 돌아가던 국제정세와 국내외 조약 체결 반대의 움직임을 구현했다.

 

 

4'대한제국의 특사들'

 

4전시실 내부
제4전시실 모습

 

 

주권 회복을 위해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대한제국 헤이그 특사들의 활동을 각종 영상으로 재구성했다.

 

 

2

고종이 외국 사신들을 맞았다는 알현실

 

알현실 사진
복원된 중명전 2층의 알현실 사진

 

 

2층에는 고종이 외국 사신들을 맞았다는 알현실이 있다. 같은 층에 문화유산 국민신탁 사무실도 같이 위치해있어 개방을 안했지만, 2017년 말부터 알현실에서 특별전을 열어 개방한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30분부터 오후 530분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관람과 관련한 더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관리소로 문의하면 안내받을 수 있다. 안내실 전화는 02-751-073

 

4. 중명전 복원 오류 논란

 

러일전쟁 당시의 사진
러일전쟁 당시의 중명전

 

중명전을 복원하면서 고증을 잘못했다는 논란이 있다. 근대사료 연구자인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016725일 한겨레에 1905년 당시 미국에서 출간한 러일전쟁 사진집에 실린, 당시 미국공사관 마당에 도열한 경비병들의 모습과 그 뒤로 보이는 중명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을 보면 중명전 건물 정면 가운데 부분에 1층 현관과 2층 베란다까지 함께 튀어나온 포치가 있다. 그러나 현재 복원한 중명전은 1층 현관만 튀어나와 있고, 2층 부분은 다른 면의 테라스와 같이 돌출하지 않은 구조라 복원을 잘못했다는 것이다.

 

2010년 문화재청이 대한제국 시기 사료들을 토대로 복원했으나 2층과 벽면 부위 등의 고증이 불명확하다는 지적을 계속 받아왔는데 이 사진 자료의 공개로 확실히 밝혀진 셈. 당시 복원공사 자문을 맡았던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는 구한말 건물 정면을 근접해 찍은 사진은 처음 본다. 복원 당시 건물 정면 원형에 대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아 벽체의 원형을 추정하면서 복원했던 만큼 이번에 발굴된 사진은 앞으로 건물 지붕과 정면 등을 재복원할 때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문화재청 측은 "당장 재복원 방침을 정하기는 어려우며 앞으로 전문가 자문회의를 통해 원형 사진을 검토해 재복원 여부 등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원형 복원을 하지 않았고 관련 계획도 알려진 게 없다.(...)

 

또한 현재 원형 복원을 한 것도 아닌데, 본래는 벽돌 구조에 목조 바닥으로 이루어진 구조였다. 그러나 현대에 철근콘크리트가 추가되었고 문화재청이 복원 공사를 할 때 이것을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내부에 화장실이 있고, 전기공사가 이루어져 사무실과 현대 전자제품들이 잘 돌아가고 있다.

 

 

5. 을사늑약 체결의 현장, 중명전

 

을사늑약문
중명전 제2전시실에 전시된 을사늑약문

 

5.1 을사늑약

을사늑약은 190511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다.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되었다.

 

 

5.2 을사늑약의 주요 내용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가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인과 이익을 보호한다.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고 한국 정부는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제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고 한국 황제를 친히 만날 권리를 갖고, 일본국 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과 필요한 지역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갖고,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 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협약의 실행에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는다.

 

일본국과 한국 사이의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이 계속된다.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5.3 을사늑약의 의의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박탈하고 일본의 식민지배를 위한 전초작업이었다.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인해 열강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대한제국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했다.

 

을사늑약 체결에 대한 국내외의 반발은 거셌다. 대한제국 국민들은 을사늑약을 부패한 대신들의 친일 행위로 규정하고, 을사늑약 폐지를 위한 만세 운동을 벌였다. 또한, 미국과 영국 등 열강들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본을 비난했다.

 

그러나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행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을사늑약은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을사늑약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이다.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자주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중명전 관련 영상>

https://youtu.be/qJLRty3zdls

중명전, 덕수궁으로 돌아오다 - 문화재청 영상

 

 

 

자주묻는 질문(Q&A)

 

1. 중명전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나요?

정동극장 옆 골목길로 들어가면 중명전에 대한 설명 표지판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중명전이 보입니다.

 

2. 중명전은 왜 ''자를 사용했나요?

중명전의 이름에 대한 여러 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일제강점기에 사용된 한자로,

''''의 이체자입니다.

 

3. 덕수궁에서의 중명전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인가요?

중명전은 한일병합 이후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사용되었으며, 1910년에는 일본과의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4. 중명전은 언제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나요?

중명전은 2010년에 복원 및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5. 어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나요?

중명전은 2007년에 사적 12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덕수궁 궁역으로 재편입되어 있습니다.

 

6. 중명전의 현재 모습은 어떻게 되어 있나요?

현재 중명전은 역사적 가치를 존중하며 복원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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