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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근현대(인물과 유적지)

대한제국의 외교: 서로 다른 세계를 아우르다

푸름이j 2023. 11. 1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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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주국가로의 시작, 대한제국의 외교

 

 

대한제국의 외교는 서로 다른 세계를 아우르는 여정이었습니다. 1853년의 조선과 미국의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된 이 여정은 다양한 미국의 변화와 조선의 외교적 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1.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다

1.1 1853: 조선의 미국과의 첫 만남

조선이 처음으로 미국과 마주했던 1853, 미국은 미지의 나라로 여겨졌습니다. 이 첫 만남은 두 나라 간의 문화적 차이를 강조했고, 이어진 1871년의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무지한 오랑캐로 변했습니다.

 

1.2 1871: 무지한 오랑캐로 변한 미국

신미양요 이후, 미국은 조선을 강제로 개방하려 한 무지한 오랑캐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 변화는 조선에게 새로운 국제 관계의 필요성을 일깨웠습니다.

 

 

2. 서양 국가와 첫 번째 맺은 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

2.1 1876: 조일간 수호통상관계 성립

조선이 일본과의 수교를 맺은 후, 미국도 조선과의 수교를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을 통한 교섭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청국의 주선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성립되었습니다.

 

2.2 1882: 조선의 다각적 외교 관계 필요성

1882, 조선은 복잡한 국제 관계에서 서양 국가와의 다각적인 외교 관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은 두 나라 간의 교류를 개막했습니다.

 

2.3 1883: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의 의미

조미수호통상조약은 1883년에 체결되었고, 이후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는 미국의 발전된 도시와 기술을 경험했습니다. 이 체험은 조선에게 '배워야할 나라'로의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조미조약 시작부분
조미조약 시작 부분1882년 이후, 서울대학교 한국학 규장각 연구원 보존

 

 

조미조약 원본
고종 서명이 있는 조미조약 원본  1882년 , 미국국립문서관리원 보존

 

3. 최초 조미 외교사절: 보빙사

3.1 1883: 보빙사의 미국 경험

1883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최초로 조선에서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가 등장했습니다. 이 경험은 조선과 미국 간의 역사적 교류의 시작이었습니다.

 

3.2 미국의 광명 세계배워야할 나라

미국을 경험한 보빙사는 당시의 미국을 광명 세계라 칭할 만큼 놀라워하며, 미국이 '배워야할 나라'로의 탈바꿈을 지켜봤습니다.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의 사진
미국으로 파견된보빙사

 

 

 

당시, 보빙사들이 대통을 방문했을 때 절을하는 조선의 예법을 그대로 지키는 보빙사를 보고 놀라워했던

모습의 그림이  미국의 잡지에 실렸다.

 

보빙사 기사 사진
미국 대통령을 방문한 보빙사 절을하는 보빙사를 보고 놀란 미국 공무원

Tip!  보빙사

-의미 :1883년 조선에서 최초로 미국 등 서방 세계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

-보빙의 뜻

報(갚을 보) ,  聘(부를 빙) : 답례로서 어떤 나라를 방문하는 것 

 

4. 자주외교를 향한 노력, 첫 발을 내딛다

4. 자주외교를 향한 노력, 첫 발을 내딛다

4.1 1887: 박정양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

1887, 조선은 자주 국가임을 알리기 위해 박정양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하고 미국에 파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청이 간섭을 시도하며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시작했습니다.

 

4.2 박정양의 독자적인 외교활동과 영약삼단의 갈등

초대 주미조선공사관(주미 대한민국 대사관) 박정양

 

 

초대 공사관 사진
초대 주미 공사관 박정양

 

 

 

고종이 박정양을 미국 전권대신으로 임명한 것은 188778일로 임명 후 한달 남짓 부임준비를 한다음 고종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미국으로 출발하려고 했다. 그러나 출발 직전 청국(淸國)의 항의로 출발을 늦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청국은 외교사절을 서양에 파견하려면 왜 미리 상의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국가 재정이 어려운데 외교사절을 미국에 상주 시킨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었고 또한 외교 사절의 호칭문제를 문제 삼았다.

 

그러나 박정양은 미국에 도착해서부터 영약삼단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했다. 워싱턴에 도착하고 그 다음날 110일 미국 국무성으로 베이어드 국무장관을 예방하여 한문으로 쓴 국서의 부 본과 영문독본을 제출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봉정하는 날자를 잡았다. 이러한 사실을 안 워싱턴 주재 청국공사는 박정양에게 사람을 보내어 영약삼단을 이행 하라고 따졌다. 그러나 박정양은 본국을 떠나 올 때 너무 급하게 서둘다가 정부의 지시를 자세히 받지못하고 왔으며 영약삼단을 따를 수 없다고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았다. 박정양은 계속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고 청국공사와의 불화 등이 문제가 되어 부임한지 11개월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박정양은 미국에서 전권대신으로 활동한 경험을 1888년 미속습유'(美俗拾遺)에 썼다. 박정양은 미속습유에서 "이 나라는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해 만든 나라로 권리가 주인인 백성에게 있다. 그러므로 비록 보잘것없는 평민이라 할지라도 나랏일을 자기 일처럼 돌보아 마음과 몸을 다하여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다. "라면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기억했다

 

Tip!  알아두면 쉬워요 - 영약삼단의 의미와 내용

-의미 : 미국으로 외교사절을 파견하기전 청나라가 제시한 세가지 원칙

            미국과의 외교를 간섭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시한 원칙

<영약삼단의 내용>

"조선의 외교사절(공사)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를 잡는다.

중대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라는 것이었다.

 

 

5. 주미조선공사관(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의 역사

5.1 1889: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의 임차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는 1889년에 임차되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할 때까지 16년간 대한제국의 공사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5.2 1891: 공사관 매입과 자주외교의 상징

조선은 자주외교를 알리기 위해 1891년에 주미공사관을 매입했습니다. 이 건물은 자주외교의 상징이 되었고, 미국과의 교류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5.3 2018: 복원된 공사관의 의미

2018, 주미공사관은 복원되어 국내외에서 발견된 문헌과 사진을 바탕으로 재현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한미 교류의 역사를 살아있게 하며, 워싱턴 DC에서 보존된 유일한 외국 공관 중 하나입니다.

 

미국 신문에 실린 주미조선공사관 소개 내용
1893년 미국에서 발행한 데모레스츠 매거진에 실린 주미대한제국 공사관 소개글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전경사진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전경사진,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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