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름이의 이야기 여행

7년간의 전쟁의 기록, 난중일기(亂中日記) 본문

한국사이야기/고대~조선(인물과주제)

7년간의 전쟁의 기록, 난중일기(亂中日記)

푸름이j 2024. 1. 24. 13:34
728x90
반응형

 

 

임진왜란 중 "명량대첩"

 

 

 

 7년간의 전쟁,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난중일기(亂中日記)

 

 

충무공 이순신 초상화
충무공 이순신 표준 영정

 

 

1.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소개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 7(1592~1598) 동안 군중에서 쓴 일기이다. 196212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76호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825일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書簡帖 壬辰狀草)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일기 7책과 서간첩 1, 임진장초 1책까지 총 9권이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고, 2013618일 광주에서 열린 '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의 권고를 유네스코가 받아들여,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書簡帖 壬辰狀草)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난중일기 사진자료
난중일기 친필본

 

2. 난중일기(亂中日記)의 내용 

 

임진왜란의 전황과 전투 상황

난중일기에는 임진왜란의 전반적인 전황과 주요 전투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은 전투에 앞서 철저한 준비를 하고, 전투 중에는 용맹하게 적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명량해전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일은 난중일기의 백미로 꼽힌다.

 

이순신의 군사적 지휘와 전술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군사적 지휘와 전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담겨 있다. 이순신은 적의 전력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전술을 구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특히, 지형을 이용한 전술과 기습 공격은 이순신의 대표적인 전술로 꼽힌다.

 

이순신의 개인적인 일상과 정서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개인적인 일상과 정서가 담겨 있다. 이순신은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한 위대한 장군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또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3. 두 개의 정유일기

난중일기에서 명량해전이 있었던 해인 정유년(1597)의 일기는 두 개의 사본이 존재한다. 모두 이순신 본인이 쓴 것으로 정유년 41일부터 1028일까지 쓴 제5(27)와 정유년 85일부터 이듬해 무술년 14일까지의 일을 기록한 제6(20)의 사본이다. 정유년 84일부터 108일까지의 일기가 중복되어 있는데 양자를 비교하면 제5책에서 간지의 착오가, 6책에서 기사의 상세한 확충이 확인된다.

 

김경수는 이에 대해 이순신이 처음 쓴 정유년 일기의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고 시간의 여유를 틈타 이순신이 기억을 더듬어 다시 쓴 것으로 추정하였다. 명량해전을 치르던 날인 916일의 일기는 난중일기 분량 가운데서도 가장 긴 분량의 일기이기도 하다.

정유일기 사진
정유일기 친필본

 

4. 난중일기의 사본 및 간본

난중일기의 대표적 사본과 간본은 이순신 본인이 초서로 쓴 친필 원본과, 친필본을 토대로 조선 정조대에 초서를 정서하는 작업을 통해 정리한 전서본이 있다. 1932년 원본과 전서본의 내용을 합친 형태의 간본이 조선사편수회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빠졌던 부분과 누락된 부분이 계속해 이후 발견되면서 내용에 대한 추가 연구와 번역이 이루어졌다.

 

4.1 친필본

전서본 일기가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하는 것과 달리 친필본은 51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전문 78책으로 군중에서의 일과를 비롯해 조정에 바치는 장계와 등본, 별책, 부록 등이 초서로 적혀 있다.

임진년에서 계사년, 정유년 일기는 일기의 양이 일정하지 않고, 갑오년에서 병신년의 일기는 비교적 일정하다. 긴박한 상황에서 심하게 흘려 적은 것으로 삭제에 수정을 반복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판독이 어려울 정도로 흘려쓴 초서 글씨들은 전서본 등 후대 활자본에서도 해당 부분의 오독 내지 탈자가 확인되기도 한다. 난중일기를 연구한 노승석은 필기 상태가 유난히 심하고 훼손된 부분이 많은 것에서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파직에 투옥, 백의종군에 이어 모친상까지 당하는 악순환 속에 있었던 이순신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런 만큼 이순신의 감정을 가장 자연스럽고 온전한 형태로 전하는 일기로써의 성격을 제대로 간직한 간본이라 할 수 있다.

 

4.2 전서본

조선 정조는 재위 12(1788), "우리 나라를 재건하게 한 큰 은혜를 길이 생각하고 충무공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24] 이순신의 사적을 모아 내각에 내려 전서를 편찬하고 활자로 인쇄되는 대로 한 본을 삼도수군통제사 본영이 있던 통영의 충렬사에 간직해두고 제사지낼 것을 명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이순신의 보고서, 진중에서 남긴 7년간의 일기와 시문 등 이순신의 행적과 관련 기록에 정조 본인이 이순신을 추모해 쓴 글이 더해졌다. 간행은 윤행임과 유득공 등이 맡았으며, 초서로 쓰여 있던 친필본 일기의 내용을 정자체로 바꾸고 판각하는 탈초 작업이 이때 처음 이루어졌으며, 흔히 알려진 난중일기라는 제목도 이때 처음 붙여졌다.

 

이충무공전서는 초간본을 비롯해 후대에 이르기까지 총 6차례 간행되었고, 내용은 간본 모두 동일하다. 이충무공전서5에서 권8에 해당하는, 이른바 전서본 난중일기의 내용은 날짜면에서 친필본보다 많으며, 72,539일의 분량 가운데 1,593일의 기록이 실려 있고 946일은 누락되어 있다. 친필본에 실려있던 내용 상당수가 생략된 한편으로 친필본에 없는 을미년 일기 전문과 임진년 정월 초하루에서 422, 무술년 108일부터 12, 118일부터 17일까지의 일기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난중일기의 정본을 제작하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4.3 난중일기초

19351220일 경성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판독한 판본을 일본인이 경영하던 지카자와 인쇄부(近澤印刷部)에서 간행된 간본이다. 조선사료총간6'난중일기초 임진장초'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는데, 그 이전인 19285월에 이순신에 관한 유물 일체의 촬영은 조선사편수회에서 모두 마친 상태였으며 1934년 연차계획안 속의 사료총간목록 속에서 난중일기 초본과 임진장초(활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친필본과 전서본의 내용을 합치되, 친필본의 형태와 체재를 그대로 살려 날짜별로 나열, 친필본에서 마멸,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미상기호로 처리하였다. 수정된 내용은 오른편에 빠짐없이 표시하고, 관련 내용은 위에, 인명과 지명은 옆에 주석을 달아 놓았다. 후대 연구자들은 이 난중일기초를 가장 대표적 전범으로 삼았으며, 비교적 완벽에 가깝게 편집된 간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이전인 1916, 조선연구회(朝鮮研究会)의 주간을 맡고 있던 아오야나기 난메이(靑柳南冥)가 전서본 난중일기를 토대로 일본어 해석과 함께 원문화역대조 이순신전집(原文和譯對照 李舜臣全集)에 수록한 간본이 존재하나, 이는 임진년 정월 초하루부터 을미년 529일까지의 일부 내용만을 실은 발췌본이었다(이듬해 난중일기에 현토를 단 난중일기장이순신전집에 실려 간행됨).

 

4.4 《충무공유사본 일기초

이순신의 집안인 덕수 이씨 집안에는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라는 이름의 문헌이 전해져 왔다. 저자도 확실하지 않은 이 문헌은 이순신 집안과 관계있는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서 초록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제목이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 알려지기도 했다. 성립 시기는 재조번방지가 완성된 숙종 42(1716) 이후로 보인다. 친필본 난중일기를 옮겨 적은 유일한 판본이자 325일치의 분량 가운데 친필본과 전서본에 누락된 32일치(을미년 30, 병신년 1, 무술년 1일치 분량)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1967년 난중일기 도난 사건이 일어나고(후술) 이듬해 3, 한국의 문화재관리국은 난중일기와 함께 충무공유사를 영인 발행하였다. 2000정신문화연구봄호 제231호에 실린 박혜일(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외 3인의 이순신의 일기 일기초의 내용 평가와 친필초본 결손부분에 대한 복원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충무공유사의 원문 일기초 내용의 일부가 발표되었으며, 난중일기의 훼손된 부분을 복원할 수 있는 판본으로 평가되었다. 분량이 적긴 하지만 친필본의 마모되고 확인불능 글자, 빠진 부분이 정확히 적혀 있으며, 전서본 제작 과정에서 누락된, 상관과 동료에 대한 이순신 본인의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20086월 현충사에서는 충무공유사의 번역문과 영인문의 합본을 간행하였다.

 

 

5. 난중일기 도난사건

 

 

신문기사
난중일기 도난사건이 실린 신문기사

 

 

19671231,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인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기록한 일기인 난중일기가 현충사 유물관에서 도난당한 사건으로 196812, 현충사 사당 옆 유물관의 출입문 유리창이 깨져 있는 것을 발견한 현충사 관리인에 의해 알려졌다. 유물관 내부에는 난중일기가 보관되어 있던 진열장 유리창이 부서져 있었고, 난중일기는 사라진 상태였다. 경찰은 즉각 수사에 나섰고, 19, 부산에 거주하는 미술교사 출신의 골동품상 유근필과 그 일당 6명을 검거했다. 유근필 일당은 난중일기를 1억 원에 팔아넘기려던 것으로 밝혀졌다.

범인들은 난중일기를 훔친 후, 부산의 한 폐품 창고에 숨겨두고 있었다. 경찰은 범인들의 자백을 바탕으로 폐품 창고에서 난중일기를 찾아냈다. 난중일기는 경찰의 보호 아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1968220, 일반에 공개되었다. 난중일기 도난사건은 대한민국의 문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 사건으로 평가된다. 또한, 난중일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 이후, 정부는 문화재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문화재보호법이 개정되고, 문화재 보호 시설이 확충되었다. 또한, 문화재에 대한 교육과 홍보도 강화되었다.

오늘날 난중일기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재로 자리 잡고 있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의 역사적 전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자,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6. 난중일기의 번역

난중일기의 가장 오래된 국역본은 19604월에 이은상이 친필본의 원문교열을 마치고 문교부에서 간행한 이충무공난중일기라는 제목의 국역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보다 앞서 1953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언론인 설의식이 수도문화사에서 간행한 이순신 수록(手錄) 난중일기의 존재가 알려졌다. 2년 뒤인 19551130일에 북한에서 월북문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리순신장군전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평양 소재 국립출판사 주필을 맡고 있던 이상호가 5천 부를 간행하였다.

 

홍기문의 번역은 신문관본과 통영본, 두 개의 이충무공전서판본을 기초로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난중일기초를 토대로 하여 번역한 것으로, 이충무공전서의 내용 가운데 충무공의 저작이 아닌 것을 삭제하고 번역하였다. 홍기문은 이 번역본에서 "친필본보다 전서본이 간략하게 된 것은 윤행임이 삭제하고 이두문을 임의로 수정한 것이다."라며, 난중일기의 판본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홍기문의 번역은 친필본과 전서본의 최초의 합본 번역이라는 의의가 있지만, 북한에서 발행한 덕분에 북한 사투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친필본 난중일기를 확인하지 않은채 활자본만을 토대로 번역해 친필본의 미상, 오독 부분을 밝혀내지는 못했다는 한계도 있었다(이후 중간본이 간행).

 

이은상은 1960년 난중일기 간행본에서 "공의 초고와 전서 중의 채택되어 있는 난중일기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107일까지만 남아 있던 무술일기의 빠진 부분을 장예초본 별책(충무공유사일기초)에서 107일부터 117일까지의 친필 일기초 2면을 찾아내 수록했고, "공의 친필초고를 완전 채록했다"고 자부하였다(다만 이은상은 장예초본 별책이 충무공유사일기초와 동일한 것임은 몰랐다). 이은상이 난중일기를 번역한 1960년 부산대학교에서 총장 윤인구에 의해 충무공연구실이 설치되어, 당시 친필 난중일기 초고 7215장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당시 경무대(청와대)와 부산대 도서관, 현충사에 각각 한 부씩 비치했었다.[45]

 

1968년에 이은상이 번역한, 친필본과 전서본이 합본된 난중일기가 현암사에서 크라운판()으로 간행되었다. 공교롭게도 지문각에서 이석호가 역주한 난중일기도 이은상 번역본과 같은 날(196842)에 발행되었는데, 이석호 역주본은 갑오년 713일과 병신년 82, 정유년 72일 등 전체 분량 가운데 126일치가 빠졌고 이순신이 지은 한시가 부록되었고, 가격도 현암사판(8백 원)보다 저렴한 390원이었다. 한편 이은상 번역본 난중일기는 원문과 함께 난중일기속 지명과 현대의 지명을 대조해 표로 정리한 것을 부기하였다.

 

한편 2004년부터 문화재에 대한 디지털 정보화 사업의 일환으로 난중일기 원문과 원본사진이 국가기록유산에 게재되고, 친필본 탈초와 원문 해독을 맡았던 노승석이 10여 곳의 오류를 발견하였다. 노승석은 자신이 발견한 오류의 수정을 반영하여 2005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동아일보사)을 출간하였고, 충무공유사해독 과정에서 찾아낸 32일치를 첨가한 표정교감본 임진일기를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를 통해 20073월에 간행하였다. 5월에 박해일 교수 외 3인이 친필본을 활자로 옮긴 이순신의 일기초를 간행하였는데, 원문에 구두를 넣지 않았고 본서 속에 수록된 장계와 서간문의 출처를 밝히고 내용과 형식을 친필본 형태로 상세편집하였다.

 

이순신을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포스터

 

영화 명량
영화 "명량" 의 포스터

 

영화 "한산:용의출현" 포스터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포스터

 

난중일기를 소재로한 소설

 

김훈의 [칼의노래]

.한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당대의 영웅이자, 정치 모략에 희생되어 장렬히 전사한 명장 이순신의 생애를 그려냈다. 작가는 시대의 명장 이순신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함께 표현해내며 사회 안에서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삶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전장에서 영웅이면서 한 인간이었던 이순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공동체와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선 이들이 지녀야 할 윤리, 문(文)의 복잡함에 대별되는 무(武)의 단순미, 4백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도 달라진 바 없는 한국 문화의 혼미한 정체성을 미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
소설[칼의노래] 사진

 

 

 

김탁환의 장편소설 [불멸의 이순신]  전8권

오늘, 영웅이 돌아온다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긴 명장 이순신을 새로운 시각으로 입체적으로 살려 낸 장편 역사소설
박제된 위인 이순신이 살아 숨 쉬는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23전 23승, 빛나는 명장의 신화 뒤엔

가슴으로 시대를 느끼며 뜨겁게 고뇌했던 한 남자가 있었다. 모두가 따르면 옛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탐구하여 승리의 길을 연 불굴의 영혼을 만난다.

 

책 사진
김탁환의 장편소설 [불멸의 이순신] 세트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