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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고대~조선(인물과주제)

조선시대의 교육과 시험

by 푸름이j 2023.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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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에서의 과거시험 재현
과거시험 재현

 

 

 

 

 

 조선시대의 교육체계와 시험

 

 

사진자료
공부하는 양반

 

 

시기별 교육 형태

 

첫째, 교육체제의 확립기(태조~연산군, 1392~1506) 

조선의 왕권 확립과 조선사회의 지배체제와 교육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국가가 교육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교육사상의 확립, 교육체제의 확장과 정비, 교육과정, 교육 방법의 정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교육과 과거 제도가 확립되어지는 시기이다. 특히 교육사상적 측면에서 숭유척불 정책을 과감하게 시행하였으며,

교육 제도에서 관학을 확장ㆍ정비하여 성균관, 사학, 향교가 발달하였다.

 

둘째, 교육사상의 발전과 사학의 발달기(중종~경종, 1506~1724)

 조선 건국 이후 형성된 전통적 훈구파와 사림에서 학문 연구를 통하여 형성된 신진 사류 사이에 이념적 투쟁이 일어나고, 정치적으로 권력 투쟁이 발생된다. 사상적으로 성리학의 연구가 활발하여 대유학자인 서경덕, 이황, 이이 등을 배출하였다. 교육적으로는 국가의 교육 정책이 관학위주에서 개인이 설립하는 서원의 교육에 주도권이 이전되면서 서원의 교육이 크게 발전하였다.

 

셋째, 실학 교육사상의 형성 및 발전기(영조~고종, 1725~1876) 

임진ㆍ병자의 병란이 있은 후에 사회적 변동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조선은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으로 정치 체제가 문란해지고 정치적 혼란이 생겼다. 그리고 임진ㆍ병자의 양란으로 사회의 기강이 문란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에 대한 반성과 문제 해결을 위한 실학사상이 대두하게 되었다. 실학자들은 청조(淸朝)의 고증학(考證學)과 서학(西學)의 영향을 받아 문제 해결을 구상하게 되었다. 교육적 측면에서는 학제의 개편, 국가의 교육 관리, 교육 내용에 자국 문화의 포함 등을 구상하였다.

 

넷째, 근대교육의 형성기(고종~순종, 1876~1910) 

우리나라의 근대 교육의 도입기이다. 조선이 외국의 문물을 도입 수용하는 시기로서, 서양의 교육사상, 교육 내용, 교육 방법이 접촉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교육 운동이 전개되고 서양식 학교가 건립되어진다. 조선을 침략하고자 하는 열강에 대항하여 민족 교육 운동이 일어난다. 민족 교육 운동은 재래의 학교교육인 주자학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나고, 서양 교육사상에 의한 자주적 국가, 자주적 시민교육을 목적으로 학교교육을 형성하게 되었다.

 

2. 조선시대의 교육

 

성균관
성균관의 별당, 비천당 임금 과거시험 참관시 사용하였던 곳

 

관학은 국가가 설치하고 운영한 교육 기관으로, 서울에는 성균관과 4부 학당,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습니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 과거의 소과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가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문과의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과 다양한 특전을 받았습니다.

 

4부 학당은 성균관의 준비 학교로, 각 학당마다 100여 명의 학생을 받아 유학의 기초를 가르쳤습니다. 향교는 지방의 양반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으로, 소학과 사서오경을 주로 배웠습니다. 향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성균관 입학 자격이나 과거의 진사시, 생원시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습니다.

 

4부학당
4부학당

 

사학은 사림이나 개인이 설치하고 운영한 교육 기관으로, 서원과 서당이 있었습니다. 서원은 유학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학문을 연구하는 곳으로, 사립 중등 교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원은 향교와 비슷한 교육 내용을 가졌으나, 향교보다 더 깊이 있는 유학을 연구하였습니다. 서당은 초등 교육 기관으로, 어린 아이들이 천자문, 사자소학, 소학, 명심보감 등을 배웠습니다. 서당은 사설 교육 기관이므로, 선생님과 학생의 수, 교육 내용, 방식 등이 다양하였습니다

 

서원
소수서원 전경

 

 

나주 향교

 

 

조선시대의 교육은 유학 외에도 다른 분야의 학문을 배우는 기관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태종 때에 십학을 설치하여 이학, 역학, 음양풍수학, 의학, 자학, 율학, 산학, 악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고종 때에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육영공원,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은 근대식 서구 교육 제도로의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3. 조선시대의 과거시험, 관료의 등용문

 

3.1 과거, 출세의 사다리

 

김홍도의 평생도
과거시험 급제후 마을 다니며 인사는 그림

 

조선시대에 관료가 되는 방법은 과거와 음서가 있었다. 과거는 출신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시험의 당락이 결정되었고, 음서는 가문의 배경으로 관직에 나가는 것이었다. 과거는 시험에 합격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일단 합격하면 6품 이상의 당하관까지는 무난히 올라갈 수 있었고, 청직과 요직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기에 과거합격을 매우 영광스럽게 여겼다.

 

과거에는 문과·무과·생원진사시·잡과 등이 있었다. 문과는 문관이 되기 위한 시험, 무과는 무관이 되기 위한 시험, 생원진사시는 생원혹은 진사라는 일종의 학위를 주는 시험, 잡과는 통역관·의사 등 기술직 중인이 되기 위한 시험이었다.

 

과거는 원칙적으로 3년에 1회씩 시행되었고, 정기적인 시험 외에도 임금의 명으로 시행되는 비정기 시험이 있었다.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시험(식년시)에는 합격정원이 문과 33, 무과 28, 생원 100, 진사 100, 잡과 46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과거의 최종 합격자가 정해져서 합격자 명단을 발표한 후에 생원진사시나 잡과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백패를, 문과나 무과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홍패를 나누어 주었다. 문과·무과 합격자는 특별히 대궐에 들어가 임금과 종친·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서 홍패를 받았다.

 

이 예식이 끝난 후에는 합격자가 거리 행진을 하면서 시관·부모·친척 혹은 자신이 공부하였던 곳을 방문하여 축하를 받았는데, 이를 유가(遊街)라 한다. 유가는 보통 3일 동안 도성 안에서 이루어졌다.

 

출세의 지름길이 되는 과거시험은 문과였다. 조선시대 재상을 지낸 사람의 89%가 문과 출신이었다. 문과합격자는 사다리를 올라가듯 이러한 관청의 관원을 차례로 거쳐서 재상인 의정의 자리에까지 갈 수 있었다.

소과 응시도
김홍도의 소과 응시도

 

3.2  봉미, 할봉, 역서의 도입

- 봉미의 의미와 활용

봉미는 응시자의 인적 사항을 포함한 피봉을 답안지 오른쪽 끝에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채점 담당관의 몰래 열람 가능성으로 봉미 부분을 잘라내어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사진자료
1633년(인조 11) 송시열이 생원시를 볼 때 시권에 적어낸 봉미(封彌)이다. 봉미는 시권의 오른쪽 끝에 본인과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외할아버지의 이름, 관직, 본관 등을 쓴 부분으로, 풀을 발라 봉하였다.

 

-할봉의 역할과 방식

할봉은 봉미된 피봉 부분을 채점이 끝날 때까지 따로 보관하는 것으로, 피봉과 답안이 혼동되지 않도록 번호를 매겼습니다.

 

사진자료
시권은 명지(名紙) 부분과 답안지 부분을 잘라내어서 시관이 응시자 신원을 확인할 수 없도록 하였다.(『고문서집성』3, 해남윤씨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역서의 필요성과 기능

역서는 채점 시 관계자가 응시자를 식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필체나 답안지의 질을 표식 등으로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사본을 활용하여 부정행위를 차단하는데 활용되었습니다.

 

사진자료
역서된 답안지에는 ‘사동(査同)'이라고 씌어 있다. (『고전자료총서 82-2 광산김씨 오천고문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3.3문제의 제기: 유학 사상과의 갈등

과거의 공정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응시자의 출신이나 배경으로 관료를 선발하지 않고 능력에 기반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유학 사상을 중요시하고 있었기에 시험만으로는 응시자의 유학적 소양을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3.4  실학자의 제언과 과거 개혁 논의

-실학자의 고찰과 응시자 검증 방법

실학자들은 응시자의 도덕적 인성을 검증하고, 관료 선발 방식을 바꾸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쉽지 않았으며, 시험 방식을 경의와 시무책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시되었습니다.

 

-출세 욕망과 부정행위의 증가

과거는 출세의 길이었기에 응시자들은 부정행위를 일삼았습니다. 대리 시험, 부정행위자와 시관의 개입 등 다양한 방법으로 부정행위가 이루어졌습니다.

 

3.5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과 파방(罷榜)

- 부정행위 정도에 따른 처벌

부정행위 정도에 따라 응시자의 과거 응시 자격을 정지하거나 합격자 명단에서 삭제되었습니다.

 

- 파방의 형벌과 깊은 정치적 연관성

부정행위자를 변방의 군무로 보내는 파방은 단순한 처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배제와 관련된 파방은 특히 큰 논란을 빚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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