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이야기/고대~조선(인물과주제)

조선의 왕권 계승을 상징하는 공간 - 경복궁"계조당"의 부활

by 푸름이j 2023. 10. 31.
728x90
반응형

 

 110년 만의 부활 왕세자의 공간 " 계조당"

 

 

 

조감도
계조당복원 조감도

 

 

경복궁 내 '계조당(繼照堂)'6년간의 복원을 거쳐 20일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이 건물은 조선의 왕권 계승을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왕세자의 집무실로 활용되었던 곳으로, 1910년의 일제 강점기 이후 약 110년 만에 제 원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과거와 현재, 경복궁 '계조당'의 역사

계조당은 1443년에 조선의 세종(13971450)이 왕세자였던 문종(14141452)을 위해 건립한 건물로, 그 이름부터가 왕위 계승을 상징합니다. 이 건물은 경복궁 동쪽에 위치하며, 문종의 집무 공간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이 왕세자에게 진찬(음식을 올리는 궁중 잔치)을 올리는 장소로도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종 승하 뒤에는 이 건물이 헐리고, 1891년 고종(18521919) 때 왕세자 순종(18741926)을 위해 현재 위치에 재건되었습니다.

 

세종 때의 계조당과 동궁

세종은 경복궁 동쪽에 세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차기 왕으로서의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이러한 공간은 동궁(東宮)이라 불림과 동시에 춘궁(春宮)로도 알려졌습니다. 세종은 동궁의 중심에 자선당(資善堂)과 첨사원(詹事院)을 건설하였습니다. 세자의 서연(書筵)을 지원하는 자선당은 1427년에 조성되었으며, 세자를 보좌하는 기관인 첨사원은 1442년에 설립되었습니다. 1443, 세종은 세자가 신하들의 조회를 받을 수 있는 건물로 계조당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계조당입니다.

 

계조당과 왕세자의 권위

14435, '세종실록'에는 "왕세자가 조회받을 집을 건춘문 안에다 짓고, 이름을 '계조당'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로써 세종이 왕세자에게 권위를 부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세자가 조회에 참석하도록 했고, 14488월에는 세자의 조회나 서연을 남향으로 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는 세자의 위상을 왕과 동등하게 여기는 조치였습니다.

 

문종과 계조당의 소멸

문종과 계조당의 소멸

그러나 계조당은 문종의 유언에 따라 단종 때에 철거되었습니다. 문종은 세자가 신하들의 조회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계조당을 철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계조당의 부활

계조당은 1868년 고종 때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다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1868712'승정원일기'에는 "어의본궁(於義本宮)이 이번 장마를 겪은 뒤 무너진 곳이 많다고 한다. 영건도감으로 하여금 계조당 터에다가 옮겨 짓고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게 하라"는 기록이 있어, 계조당의 부활에 어의궁 건물이 활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일제 강점기와 계조당의 소멸

그러나 1910년 국권이 침탈되면서 계조당은 수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계조당을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

 

 

 

복원된 모습
복원된 경복궁 계조당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