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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고대~조선(인물과주제)

조선 시대 육조의 관청이 즐비했던 거리

by 푸름이j 2023.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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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의 중심, 육조거리

 

조선 건국과 한양 천도 당시에 계획됐다. 조선을 건국한 뒤, 한양부로 천도하면서 이곳에 경복궁이 세워지고 그 앞으로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한성부 관아가 그 앞으로 세워진다. 현대에는 광화문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고종시기의 육조거리
고종시대의 육조거리와 사람들의 모습

조선 건국과 한양 천도

조선이 건국되면서 한양(현대의 서울)이 국경의 중심지로 정해졌습니다. 이 천도의 과정에서 한양에 중요한 관청과 궁궐이 조성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경복궁이 있었습니다. 조선 건국 초기, 1395년 정도전이 태조의 명을 받아 한양이라는 도시를 만들며, 경복궁 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큰 길을 만들었습니다. 이 곳이 현 광화문광장의 전신인 육조거리입니다.

 

한양의 중심대로 "육조거리"
육조거리 모형 - 서울역사박물관

 

 

 

육조거리의 역사

육조거리는 조선시대에 한양의 중심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3964(태조 5)에는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나눌 때 이 지역에 여러 관아가 설치되었습니다. 관광방(觀光坊), 적선방(積善坊), 여경방(餘慶坊), 서린방(瑞麟坊), 징청방(澄淸坊)이라는 관아들은 이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관광방은 임금의 덕이 빛나는 것을 본다는 뜻으로, 광화문의 앞 동네로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조선 왕실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경복궁을 떠나지 않았으며, 육조거리는 여전히 조선의 행정적 중심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이루며 도시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 초기의 육조거리시기별 육조거리 그림
시기별 육조거리 지도

Tip! 알고 보면 쉬워요

- 육조란? 국가의 6관청을 줄여 6조라 부르게 되었다.

이조 - 문관 인사

호조 - 재정, 세무, 회계, 경제

예조 - 의식, 교육, 외교, 제도

병조 - 무관 인사, 군사, 우편

형조: 소송, 형법

공조: 건축, 수공업, 도구, 산림, 항만

 

-기로소 : 조선 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

               태조 3(1394)에 설치하여 영조 41(1765)에 독립 관서가 되었고,

               이때부터 임금도 참여하였다.

-장례원 : 조선 시대에, 공사(公私) 노비 문서의 관리와 노비 소송을 맡아보던 관아. 세조 때에 변정원을 고친것.

 

육조거리의 도로 구조

육조거리는 조선시대에는 현재와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지도와 달리 남북이 뒤집혀 있는데, 왕이 궁궐의 어좌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이 지도에서 동서축으로 나타나는 도로는 오늘날의 종로이고, 6시 방향에 생긴 정원 같은 공간은 창덕궁과 창경궁, 그 오른쪽 5시 방향의 네모난 공간은 경복궁이었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육조거리는 경복궁과 광화문 사이의 주요 도로였습니다.

 

육조거리의 이름

조선시대에는 육조거리에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으며, 광화문 앞길, 관아거리, 육조거리, 육조 앞길, 궁궐 앞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 지역은 관아와 중요한 역사적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경복궁과 광화문은 복구되지 못했지만, 육조와 한성부 등의 주요 관아는 여전히 이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육조거리의 특이한 도로구조

육조거리의 도로 구조는 현재와는 다소 다릅니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선을 연결하려는 노력 중에 무학대사가 관악산을 '불의 산(火山)'이라고 주장하여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축선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틀어진 구조로 조성되었습니다. 이로써 관악산의 화기를 피할 수 있었으며, 현재의 육조거리와 광화문광장이 형성되었습니다.

 

마무리

조선 시대의 육조거리는 조선 건국과 한양 천도의 중심지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경복궁과 광화문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 지역은 조선 왕조와 행정부의 주요 관아가 모여있었으며, 조선시대의 도로 구조와 육조거리의 이름에는 흥미로운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자주묻는질문(Q&A)

 

Q. 육조거리는 어떻게 형성되었나요?

A. 조선 건국한양 천도 당시에 육조거리는 경복궁과 광화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관아와 주요 관청이

    이곳에 모여있었으며, 조선시대의 중심지 중 하나였습니다.

 

Q. 육조거리의 이름은 어떻게 정해졌나요?

A. 조선시대에는 육조거리에 통일된 이름이 없었으며, 다양한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다양한 관아와

    중요한 건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Q. 육조거리의 도로 구조가 어떻게 달랐나요?

A. 조선시대의 육조거리 도로 구조는 현재와는 다소 다르게 형성되었습니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선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특이한 구조가 조성되었습니다.

 

Q.  육조거리는 어떤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나요?

A. 육조거리는 조선 건국과 한양 천도의 중심지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입니다. 조선 왕조와 

    행정부의 주요 관아가 이곳에 모여있었습니다.

 

Q.  현대의 광화문광장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A.  현대의 광화문광장은 육조거리의 일부를 이어받아 형성된 공간입니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중심지였으며,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기념비와 건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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