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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해상 영웅, 장보고 대사의 생애와 업적 본문

한국사이야기/인물이야기(고대~근현대)

신라의 해상 영웅, 장보고 대사의 생애와 업적

푸름이j 2024. 2. 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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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길을 열다, 무역왕 장보고

 

 

1979년 일랑 이종상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 (상상화)

 

 

 

1. 장보고 대사의 생애

 

 - 출생과 성장

장보고 대사는 804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수영 실력과 용맹함을 보였으며, 18세 때 당나라에 건너가 무관으로 활약했습니다. 당나라에서 활약하면서 해상 무역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쌓았습니다.

 

- 당나라에서의 활약

장보고 대사는 당나라에서 활동하면서 뛰어난 무술 실력과 리더십으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해적 토벌에 큰 공을 세워 무령군중소장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올랐습니다.

 

- 귀국과 청해진 설치

828년 장보고 대사는 신라에 귀국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습니다. 청해진은 신라의 해상 무력의 상징이 되었으며,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중요한 거점으로 발전했습니다.

 

- 해상 무역로 확보와 해상 문화 교류

장보고 대사는 해적들을 소탕하고 해상 무역로를 확보하여 신라가 중국과 일본 등과 활발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해상 무역을 통해 신라의 문화를 중국과 일본 등에 전파하고 동아시아 문화 교류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신라의 무역선 [교관선]에 관한 설명자료

 

 

- 장보고의 죽음

장보고 대사는 84643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은 신라에게 큰 손실이었지만, 그의 업적은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의 저서 [번천문집]에 기록된 장보고●정년전>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이라는 자는 자기 나라에서 서주(徐州)로 와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장보고의 나이는 서른 살이고 정년의 나이는 열 살이 젊어, 장보고를 형이라고 불렀다. 모두 싸움을 잘하였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나라와 서주에서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정년은 또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걸어가면서 물을 내뿜지 아니하였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技藝)로서 항상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
번천문집 6, 장보고정년전

 

일찍 동료이자 의형제인 정연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그곳의 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당시 당나라에는 신라방이라는 일종의 코리아타운이 만들어져 있었고 당나라는 번장이라 해서 이민족 출신을 무장으로 쓰기도 하는 등 이민족의 등용에 대해 꽤 개방적인 국가였다. 당나라에서 친구 정연과 함께 당나라 군대에 들어간 장보고는 말 타고 창 쓰는데에 탁월한 실력을 보였으며 곧 서주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少將)으로 출세하기까지 한다. 무령군은 산동반도에 할거하며 당에 맞섰던 고구려 유민 출신 절도사 이사도를 정벌하려고 만들어진 부대였는데 장보고는 무령군 소장 신분으로 평로치청번진 진압에 참전했다고 전한다.

 

2. 신라로 귀국, 청해진대사가 되어 해상을 장악하다.

 

828년 여름 4,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인데일명 보고(保臯)라고도 한다.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후에 귀국하여 임금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淸海鎭)청해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을 지키게 되었다.
삼국사기 10권 신라본기 제10 흥덕왕

 

 

장보고의 해상무역로를 표시한 지도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곧바로 서라벌로 가서 당시 임금이었던 흥덕왕에게 "당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자꾸 잡아가 노비로 삼으니 저에게 군사 1만을 주시면 제가 당의 해적들을 막겠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고, 흥덕왕은 즉각 이를 허락한 뒤 대사(大使)라는 특별 관직까지 제수해주었다. 이에 장보고는 한반도 서남부 앞바다, 지금의 완도의 장좌리, 죽청리, 대야리, 그리고 부속섬 장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를 기점으로 서남해안의 상권 및 무역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장보고가 귀국하기 6년 전인 822년에 신라에서는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던 대사건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비록 이 시기의 신라는 후삼국시대 때와 달리 전국적인 반란을 제압할 만큼의 능력은 있었지만 왕위 계승을 둘러싼 진골 귀족들 간의 피튀기는 싸움으로 인해 왕권과 지방 통제력이 자연스레 무너지면서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각에선 828년 당시 통일신라의 형편상 1만의 군사를 내어 주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10,000명의 군사라는 것은 신라 정부의 일부 군사들과 추가로 장보고의 사병이지 않느냐는 추측도 있다. 만약 사병이 맞다면 장보고는 서양의 사략선처럼 진짜로 정부의 허가만 받았지 제멋대로 해적질을 한 셈이다. 물론 반대급부로 해적들을 아예 때려잡긴 했지만 앞의 설이 맞다는 가정 하에서는 단순히 불법 군사 조직일 뿐이다. 이후 장보고의 행보를 보면 정말 해상 마피아가 따로 없을 정도.

 

해적들을 소탕한 장보고의 함대

 

해로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원래의 취지였던 해적 소탕에도 열을 올려 삼국사기에 장보고의 활약으로 신라인 노예 매매가 거의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청해진은 사실상 당대 최고의 해상 무력 집단으로까지 발전해 동아시아 지역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게 된다. 838년 당시 일본 최고의 승려로 꼽던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는 일본인이 신라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 가는데도 신라어 통역 김정남(金正南), 박정장(朴正長) 등을 고용하여 배마다 배치해 동행시킬 정도로 신라의 해상 영향력이 커져 있었다. 이 시기 중국 해안가도 대부분 신라인 집단들이 대거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엔닌은 당나라 활동 중 무사히 일정을 마칠 수 있도록 장보고에게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또 장보고는 산둥 반도에 적산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웠고 이 곳에서 신라, 일본 등에서 건너온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이 적산법화원은 장영 등 신라인들이 운영했고 정기적으로 강경법회를 열어 재당 신라인의 결집을 맡았다고 전한다. 현대 코리아타운의 한인교회와 비슷한 역할을 맡았던 셈. 적산법화원은 당무종 시대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 때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복원되어 중국에 남아 있다. 한편 장보고는 청해진과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에도 법화원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어떤 불교의식이 거행되었는지는 기록이 자세하지 못해 알 수 없지만 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면 관세음보살 신앙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방 사회 구성원은 거의 바다와 관계가 깊은 직업이었고, 당시 바닷사람과 관세음보살 신앙의 관계는 삼국유사 민장사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상술한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라는 여행기에 장보고의 도움을 정확히 기록해 놓았다. 덕분에 장보고의 활을 든 영정이 지금도 일본 교토 히에이 산 적산선원에 있다. 행적과 명성이 한중일을 넘나들어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매우 국제적인 인물이었던 셈.

 

장보고는 교관선을 당나라에 수시로 파견했고, 당나라 동해안의 신라방 사회를 원격 통제하고 이를 활용해 막대한 무역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엔닌의 일기에 의하면 839627일에 장보고가 보낸 두 척의 교관선이 적산포에 도착했는데, 청해진 병마사라는 직함을 가진 최훈십이랑이란 인물이 매물사로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훈의 일정은 적산법화원에 들러 장보고를 대리해 이를 관리하던 장영 등을 위로하고, 7개월 반 동안 중국 동해안의 주요 항구 유산포, 해주, 초주, 양주 등을 들러 무역 활동을 한 뒤 다시 적산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적산포는 장보고 무역선의 중국 측 주요 거점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는 동쪽의 일본에도 회역사라는 무역 선단을 주기적으로 파견했는데, 회역사는 어디까지나 장보고가 사적으로 보낸 무역 선단에 불과했지만 그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공식 사신단을 방불케 했을 정도였기에 당시 일본의 공식 대외 교역 창구 역할을 하던 규슈의 다자이후에서는 회역사를 받지 말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3. 장보고의 난과 비극적인 최후

 

- 장보고의 난 배경

846, 신라 경문왕 즉위 초

중앙 정치의 혼란과 지방 귀족들의 반란

청해진의 독자적인 군사력에 대한 견제

 

- 장보고의 난 과정

장보고, 난을 일으키고 청해진으로 이동

중앙 정부군과의 대치 및 전투

비극적인 해상 영웅 장보고의 사망

 

- 장보고의 난 원인

중앙 정치의 혼란과 지방 귀족들의 불만

청해진의 독자적인 군사력에 대한 견제

장보고 개인의 권력욕

 

- 장보고의 난 결과

장보고의 사망과 난의 진압

청해진의 약화

신라 내부의 분열 심화

 

- 장보고의 난 평가

신라 역사의 중요한 사건

중앙 정치와 지방 귀족의 갈등 심화

청해진의 역할 변화

 

<문헌에 나타난 장보고의 난 당시의 상황>

서울에서 사자(使者)가 이르렀는데, 대신(大臣)이 그 왕을 시해(弑害)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며 왕이 없다 하였다. 장보고는 드디어 군사 5천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며, 정년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환란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정년은 국도(國都)에 들어가 반란자를 베고, 왕을 세우고 보답하였다. 왕은 드디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장보고를 대신케 하였다.
번천문집 6, 장보고⋅정년전
4 20
이른 아침에 신라인이 작은 배를 타고 왔다. 문득 듣건대 장보고(張寶高)가 신라 왕자와 합심하여 신라국을 징벌하고 곧 그 왕자를 신라국의 왕자로 삼았다." 하였다. 남풍이 다소 세차게 불고 역류하는 조수의 물결이 거셌기 때문에 한 곳에 가만히 머물 수가 없었다. 동서로 왔다 갔다 하여 요동이 매우 심했다.
입당구법순례행기 개성사년(839)
4 20
이른 아침에 신라인이 작은 배를 타고 왔다. 문득 듣건대 장보고(張寶高)가 신라 왕자와 합심하여 신라국을 징벌하고 곧 그 왕자를 신라국의 왕자로 삼았다." 하였다. 남풍이 다소 세차게 불고 역류하는 조수의 물결이 거셌기 때문에 한 곳에 가만히 머물 수가 없었다. 동서로 왔다 갔다 하여 요동이 매우 심했다.
입당구법순례행기 개성사년(839)
8(서기 846) , 청해(淸海)의 궁복이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벌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후환이 있을 것이 염려스럽고, 그를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였다.
삼국사기 11권 신라 본기 제11 문성왕
이 무렵 궁파는 청해진(淸海鎭)에 있으면서 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 하였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이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않은 일을 하려 하니 소신이 청하건대 그를 없애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삼국유사 기이 신무대왕(神武大王) 염장(閻長) 궁파(弓巴)

 

4. 장보고 대사 사후 영향

 

 

장보고의 근거지인 청해진은 장보고 사후에 바로 없어진 것은 아니었는데, 이후 상황을 보면 못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없어지진 않았더라도 장보고 암살 당시 상당히 혼란에 빠졌던 것은 일본 측 기록 속일본후기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기 어려계(於呂系) 등 여러 사람이 일본에 귀화하면서 '우리는 장보고가 다스리던 섬의 백성입니다. 장보고가 작년에 죽었으므로 평안하게 살 수 없어 당신 나라에 온 것입니다'라고 증언했으며, 그 외에 장보고가 죽은 뒤에도 자손들이 그 곳에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서기 851) 2, 청해진(淸海鎭)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삼국사기11권 신라 본기 제11 문성왕

 

끝내 851년 신라 조정에서는 청해진을 아예 완전히 없애버렸으며 청해진에 살던 주민들을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인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청해진은 사라졌지만 장보고가 남긴 영향은 그대로 남았다. 학계에서는 장보고와 청해진이 후대 한국사에 남긴 영향으로 선종의 국내 확산과 중국 도자기 기술의 도입을 들고 있다. 우선 장보고가 교역했던 중국 저장 성 월주(越州) 지역의 자기인 월주요(越州窯)가 신라 시대 국내에서 제작된 흔적인 가마 터가 청해진의 세력권으로 추정되는 전남 서남해 강진, 해남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이곳에서 월주요 가마 터가 발견된 것에 대해 당시 중국 월주요의 제작 기술을 신라 국내에 도입해서 그것을 자체생산해 다시 수출하는 시스템을 구상한 것이 장보고였다는 설명이 따른다. 이때 국내에 도입된 월주요 기술이 훗날 고려청자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

 

또 장보고 사후에도 서남해 지역은 당으로 가는 승려들의 출발지이자 도착 지점으로 쓰였는데, 서남해 지역에서 선종이 유행하게 된 것도 당시 장보고가 해적들을 평정하여 선종 승려들이 당으로 유학하러 가는 항로를 보호해줌으로써 선종 사상의 자유로운 전파와 세력 확장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훗날 신라 말기에 일어난 호족들이 대부분 선종 승려들로부터 사상적인 배경을 얻었고 끝내는 호족 정권에 의해 신라가 무너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장보고는 후대의 한국 역사의 흐름에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공헌한 셈이다.

 

최인호의 소설 [해신]

KBS 특별기획 드라마 "해신"의 원작 소설 최인호의 [해신]

 

장보고는,『삼국사기』에는 '모반을 꿈꾸었던 반역자'로 『삼국유사』에는 '매우 미천한 해도인(海島人)으로 반란을 꾀'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통일신라 말, 타락한 지배계급에 맞서 혁명을 꾀하던 풍운아는 이렇게 역사의 패자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역사를 단순히 작품의 소재로만 활용하는 대신, 철저한 고증작업을 거친 재해석 작업을 벌여 전혀 새로운 인물을 우리 앞에 선보인다. 그는 장보고를 꺼져가던 신라왕실을 구하려던 충신으로, 노예로 팔려가던 신라인을 구한 '해신'으로 평가한다. 가진 것 하나 없던 망국 백제의 유민으로 괄시받던 그가 당나라의 일개 병사에서 통일신라 최고의 권력을 지니게 되기까지, 그리고 부하 장수의 칼날에 목을 빼앗겨버린 장보고의 일대기는 '잃어버린 역사'를 보는 씁쓸함과 역사의 물줄기 한복판에 버티고 선 영웅의 비장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백제와 일본의 고대사를 밝힌 『잃어버린 왕국』이나 조선 시대 거상을 다룬 『상도』등 역사소설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작가답게 이번 소설 역시, 현대와 고대를 넘나드는 광활한 무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더우기『삼국사기』와 『삼국유사』그리고 『일본서기』를 넘나드는 작가의 치밀한 고증은 좌절한 영웅, '장보고'를 오늘의 우리 앞에 데려다 놓기에 충분하다.

 

[최인호의 해신 전3권]

해신 1. 질풍노도
해신 2. 장미전쟁
해신 3. 해신 장보고

 

장보고를 주제로한 드라마, 만화

 

1. KBS특별기획드라마 [해신]

드라마 해신의 포스터

 

 

 

2. 어린이 만화  모험왕 장보고

만화 모험왕 장보고

 

 

 

3. SF 애니메이션 바다의 전설 장보고

SF애니메이션 "바다의전설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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