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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인물이야기(고대~근현대)

정조이야기 :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by 푸름이j 2023.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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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자신은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으나

사실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말하는 대목이다.

 

오늘은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에 대해 포스팅 해보았습니다. 정조는 조선 후기를 빛낸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그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인간적인 면모를 알아보겠습니다.

 

 

1989년 이길범 作. 상상 어진으로 실제 어진은 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 소실되었다.
이길범 화백이 그린 정조 표준 영정
 
 

 1. 정조의 어린시절

 

1.1 출생과 가정

정조는 1752년 영조 28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도세자로,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였습니다. 그러나 출생 전에 형제의 조약이 일찍 끝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장남이었습니다.

 

1.2 왕세손으로의 급부상

태어난 지 얼마 안 가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영조로부터 처형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1.3 정조의 짦은 치세

1775(영조 51)부터는 대리청정을 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1776, 할아버지 영조가 83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만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4년간 재위하다 1800년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 왕권 강화와 정치개혁

 

2.1 친정체제의 구축

정조대왕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방해했던 인물들을 처벌하고,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을 실각시켜 친정체제를 구축했습니다.

 

2.2 규장각과 법제 개혁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법제 개혁과 내치도 추진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를 개혁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3. 서적 편찬과 문화유산 보존

 

3.1 서적의 수입과 편찬

정조대왕은 청나라의 사고전서를 수입하고,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소양과 사상을 보여주는 홍재전서는 특히 유명합니다.

 

3.2 문화유산 보존

또한 그는 조선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경복궁 복원사업을 완성하고, 수원 화성을 건설하여 성곽의 아름다움과 방어력을 갖춘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4. 당파 갈등 해소와 탕평책 

 

4.1 당파 갈등 해소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된 것에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파 갈등을 해소하고 탕평책을 추진하기 위해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의 인사들을 등용하고 중용했습니다.

 

4.2 정조의 탕평책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도 중용하였다.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는 초계문신 제도를 실시하고, 규장각을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5. 외교 관계 개선과 세계화 추구

 

5.1 대청외교

정조대왕은 청나라에 대한 종속적인 태도를 고수하지 않고, 동등한 관계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대일외교에서는 일본과의 교류를 재개하고, 일본인 포로들을 송환하는 등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5.2 서양과의 만남

서양과의 만남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사절단을 접견하고,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화를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세계화의 시대에 발맞추어 조선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고 노력했습니다.

 

 

 6. 덕후 문화의 선구자 - 인간 정조

 

6.1 다재다능한 취미

정조대왕은 다양한 분야에 재능을 발휘하였습니다. 음악, 미술, , 사격, 무예 등을 즐기며 이를 공유하고자 여러 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6.2  애주가 정조

정조는 어릴 적 스트레스 때문에 술과 담배를 병적으로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술버릇은 신하들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기로 유명했으며, 이는 꼰대적인 행동으로 평가되곤 했습니다.

 

술의 경우, 자주 마시지는 않고 어쩌다가 한 번씩 마시는 정도였는데, 그 어쩌다가 먹는 술이 술에 취해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마셨고 한다. 진짜 문제는 술버릇이 매우 고약했다는 점인데, 정조의 술버릇은 신하들에게 억지로 술 먹이기였다고 한다. 현대에서는 꼰대소리 듣기 딱 좋은 최악의 술버릇을 가진 셈이다. 하물며 군주제 국가의 왕이 내리는 술이라 거절도 못하는데, 신하들이 곤혹스러워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수원화성 팔달문 근처의 팔달문 시장(남문 시장) 입구 쪽에 보면 정조가 술상 앞에 앉아 있는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 불취무귀(不醉無歸),[50] 그러니까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만, 이는 진짜로 그런 의미로 쓴 것은 아니고, 백성들이 술에 취할 흥취를 즐길 정도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글귀이다...만 정조는 이 글귀를 신하들에게 매우 철저하게 적용한 왕이었다.

 

 

술마시는 정조 동상

 

 

 7. 정조 시해 미수 사건 - 정유역변

1777년 정조 시해 미수 사건은 정조의 즉위 시절에 벌어진 반역 사건입니다. 홍상범 등이 주축이 되어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사건은 정조의 결단력과 군림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경희궁 존현각 세트장
존현각 세트장 모습

 

 

 

영화 역린의 존현각 모습
영화 " 역린" 의 한 장면

 

 

 

영화포스터
정조 시해 미수사건(정유역변) 을 그린 영화 "역린"의 포스터

 

 

영화 역린은 정조 시해 미수사건인 정유역변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로

영화제목의  '역린(逆鱗)'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이라는 뜻으로,

쉽게 말하면 건드려서는 안될 약점을 건들여 상대방의 분노를 사는 것'을 뜻한다. 

 

 

1. 영화 역린 - 네이버 통함검색

 

 

영화 역린 : 네이버 통합검색

'영화 역린'의 네이버 통합검색 결과입니다.

search.naver.com

 

 

 

 마무리

정조대왕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그의 뛰어난 리더십과 문화적 풍향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다재다능한 면모와 미래를 모색한 노력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A)

 

Q.  정조대왕은 어떤 문화유산을 보존했나요?

 A.  정조대왕은 경복궁을 복원하고,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여 조선의 문화유산을 보존하였습니다.

 

Q. 왜 정조대왕은 술을 억지로 먹였을까요?

A. 정조대왕은 술을 억지로 먹이는 행동으로 신하들에게 꼰대적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그의 군림력을 상징하는 사례입니다.

 

Q. 정조 시해 미수 사건은 어떻게 해결되었나요?

A. 정조 시해 미수 사건은 홍상범 등 범인들이 사형되는 등 엄정한 처벌을 받았으며,

    정조의 결단력을 시사하는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Q.  정조대왕이 세계화를 추구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A.  정조대왕은 조선을 국제사회에 끌어올리기 위해 서양과의 교류를 증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Q. 정조대왕의 가족 관계는 어떠했나요?

A. 정조대왕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조로부터 처형당하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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