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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인물이야기(고대~근현대)

정조의 싱크탱크 - 다산 정약용

by 푸름이j 2023.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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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에 대하여 

 

다산 정약용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실학에 대해 배우면서

보게되는 인물이 다산 정약용선생일 텐데요.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유적지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 영정사진

 

다산정약용 영정사진
다산 정약용 표준 영정 - 한국학 중앙연구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  

다산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부 마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 정재원은 음사로 벼슬을 하였으나,

당시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벼슬을 내려놓고 농촌에 귀의하였습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성호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으며, 기존의 성리학과는 달리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제시하였습니다. 정약용은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면서 개혁사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습니다.

 

정조 재위기

관료로 봉사하면서 과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였습니다. 그는 천문학, 지리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천체운동과 태양력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천문연구, 한반도와 주변 국가들의 지리와 문화를 기록한 경세유표, 홍역 치료법을 설명한 마과회통등을 저술하였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이벽(李檗) · 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서학으로 인식하고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배 이후 다시 향리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 유배 생활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순조 1) 3월 신유박해 때 두 형과 함께 경상도 장기현(오늘날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유배되었다. 노론에서는 정 씨 형제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셋째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만 순교를 택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이후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1801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정약용이 18년 동안 귀양 생활을 조정에서 끊지 못했던 것도 영의정이던 노론 벽파의 거두 서용보가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강진이 그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다.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 해남 윤씨의 종가로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지어놓았다. 바로 이 집안이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종가다. 신위를 불태워 처형된 윤지충, 권상연은 정약용과 먼 외가 친척 사이가 된다. 그런데 하필 강진현감이 노론 벽파의 맹장 이안묵이였는데 이안묵은 금평군 이제의 증손이고 이하술의 손자였으며 종친의 후손이였는데 이안묵은 서학의 추종자의 친척이고 남인인 정약용을 못마땅히 여겨 유배지에서 정약용을 냉혹하게 대했고 정약용도 이안묵 재임 3년 동안 유배지에서 힘들었다. 이안묵은 강진현감에 있었을 때 토색질을 하여 탄핵당하고 권유와 합작해 대혼저지기도 사건에 가담하여 역적으로 몰려 정법당했다. 진짜 정약용을 괴롭힌 사람은 노론에서 악연인 서용보와 친했지만 서학 문제로 원수가 되버린 이기경과 노론 벽파의 강경파인 이안묵이 되겠다.

방례초본과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경세유표를 썼다. 목민심서는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기 위한 책이고 흠흠신서는 공정한 재판을 논한 책.

 

 

다산초당 전경사진
다산 정약용 유배지 - 강진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의 저서

 

다산정약용의 저서 - 목민심서

 

다산정약용의 저서 - 흠흠신서

 

다산정약용의 저서 - 경세유표

 

다산정약용 저서에 대한 설명 

 

 목민심서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책이다. 제목의 뜻은 목민할 마음만 가졌지 몸소 시행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라고 다산 본인이 밝혔다. 혹은 목민관이 가져야 할 마음(牧民心),

백성을 다스리는 마음에 관한 책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② 흠흠신서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형사사건의 조사 · 심리 · 처형 과정을 다루는 관리들을 계몽하기 위해

1822년에 편찬한 법제서. 형법서.

 

 경세유표

행정기구의 개편을 비롯한 관제 · 토지제도 · 부세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원리를 제시하여 1817년에 저술한 정책서.

 

 

 

다산정약용의 생애, 업적, 유배생활, 다산 정약용이 남긴 저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어떤가요?

도움이 되셨나요?  다산정약용 선생은 당대의 학자이자 정치가 였습니다. 

 

사진, 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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