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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인물이야기(고대~근현대)

영리하고 효성스러운 세자 - 효명세자

by 푸름이j 2023.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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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세자 이야기

 

오늘은 역사 교과서에도 잘 나오지 않은 인물에 대해 소개 하려고 합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에대한 이야기 인데요 영리하고 효성스럽다는 뜻으로 효명이라 지었다고 합니다.

효명세자는 부모인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해 창덕궁 후원에 "연경당"을 지어 창작무용을

올려드렸다고 합니다.

 

목 차

1. 효명세자의 짧은 생애

 

2. 효명세자의 궁중 연회와 예악 창작

 

3. 효명세자를 기억하는 공간

 

 

효명세자(익종)의 실제어진
효명세자 실제어진

 

복원된 어진
효명세자 복원된 어진

 

 

효명세자의 짧은 생애

 

 

효명세자는 순조와 순원왕후의 원자로, 1809년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습니다.

효명세자는 왕비의 소생으로 태어난 세자였는데, 이는 숙종 이후 150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효명세자는 총명하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 궁중무용인 정재를 집대성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춘앵전, 가인전목단, 고구려무, 향령무, 장생보연지무 등

많은 무용을 창작하거나 개선했으며,

 

효명세자는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큰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1812년에 세자로 책봉되고, 1827년에는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 순조의 대리로 청정을 맡았습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견제하고, 정조의 정치이상을 계승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효명세자는 정조의 유지를 받은 김재찬을 사부로 삼고, 박규수와 같은 개화파

학자들과 친분을 맺었습니다. 효명세자는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치려고 했으나,

1830년에 갑작스럽게 병으로 죽어버렸습니다. 효명세자의 죽음은 조선 후기의 비운 중 하나로 평가되며,

그가 살아서 왕위에 오르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효명세자와 그의 부인 신정왕후 조씨는 수릉이라는 합장릉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수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며, 동구릉 재실에서 가장 가까운 왕릉입니다.

수릉은 1834년에 처음으로 익종이라는 묘호를 받았으나, 1899년에 문조라는 묘호로 바뀌었습니다.

 

 

효명세자의 궁중 연회와 예악 창작

 
 

참고이미지
궁중정재 중 "향령무"

 

 

참고이미지
궁중 정재 중 "만수무"

 

 

1) 향령무 : 향령이라고 하는 방울을 들고 춤을 추는 무용이다.

 

.2) 만수무 : 꽃을을 올릴 때 행해진 무용으로  선도(신이 사는 나라에 있다는 복숭아)를

                  임금에게 바치며 춤을 추는 무용이다.

 

 

효명세자의 예악 창작은 주로 궁중 연회에서 발휘되었습니다.

청정한 3년 동안 해마다 부왕과 모후를 위해 큰 연회를 열었는데,

순조의 존호(尊號- 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던 칭호)를 올리는

자경전 진작정례의(慈慶殿進爵整禮儀. 1827)’,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을 기념하는

무자진작의(戊子進爵儀. 1828)’, 순조 등극 30년과 탄신 40년을 기념하는

기축진찬의(己丑進饌儀. 1829)’가 그것이었습니다. (궁중 연회는 연향[宴享]’이라고

통칭되는데, 그 규모가 큰 순서대로 진풍정進豊呈·진연進宴·

진찬進饌·진작進爵으로 나뉩니다.)

 

효명세자는 이런 큰 궁중 행사를 직접 관장하면서

상당수의 악장과 가사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중요하게 평가되는 부분은 궁중 무용인

정재무(呈才舞)를 다수 창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규모와 복식을 더욱 크고 화려하게 설정한 정재무를 여럿 창작했습니다.

해당 연회의 각종 사항을 자세하게 기록한 의궤(儀軌)에 남아 있는

그런 업적은 그 분야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대규모의 궁중 연회를 거행하는 데 주력한 까닭은

효심의 발로와 정치적 포석으로 해석됩니다.

세자는 유교의 근본인 예악을 중시하는 덕망 있는 군주의 존재를

널리 알려 세도정치를 억제하고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효명세자를 기억 하는 공간 

 

1) 의두합 과 운경거

 

 

왕세자의 독서공간
창덕궁 후원 " 의두합과 운경거"

 

의두합과 운경거는 효명세자가 독서와 시, 음악을 즐기던 곳으로, 애련지(愛蓮池)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의두합은 앞면 4칸에 누마루가 있는 사대부 사랑채 형태를 하고 있으며,  1칸반짜리 작은

건물인 운경거(韻磬居)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의두합의 이름은 효명세자가 자신의 별명인 '의두를 붙여 지은 것으로, '의두가 쉬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의두합은 순조에게 청하여 영화당 북쪽에 있는 독서처를 고쳐짓고 그 곁에 작은 건물을 따로

한 채를 지었다고 합니다. 의두합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틈틈이 독서하고 시와 음악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던 곳이었습니다.

 

운경거는 궐 내에서 가장 작은 건물로 한 칸 반짜리라고 합니다. 운경거의 이름은 '시와 음악이 있는 집

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운경거는 의두합과 연결되어 있으며, 효명세자가 시와 음악을 감상하거나 작곡하는

곳이었습니다. 운경거에서는 효명세자가 만든 시와 노래가 여러 가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의두합과 운경거는 효명세자의 문화적 소양과 취미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창덕궁 후원을 방문할 때

꼭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2) 연경당

 

 

 

후원의 쉼터
조선시대의 연경당

 

 

후원의 쉼터
현재의 연경당

<현재의 연경당 구성도 설명>

⓵ 장락문(연경당 영역의 정문) ⓶ 장양문(사랑채 출입문) ⓷ 수인문(안채 출입문) ⓸ 안채 ⓹ 통벽문(반빗간 출입문)

⓺ 연경당 본채 ⓻ 선향재 ⓼ 농수정 ⓽ 반빗간(반찬을 만드는 곳.)

 

연경당은 창덕궁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2012816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7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연경당이라는 이름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으로,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해 효명세자가 잔치를 베풀고자 만든 곳입니다.

연경당은 사랑채의 당호이자 집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며,

반빗간, 안방, 사랑채, 대청, 부엌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연경당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생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건축유산이며, 창덕궁의 아름다운 정원과 어우러져 있습니다.

 

연경당을 방문하면, 당시의 궁중문화와 사대부의 일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연경당은 창덕궁 내에서도 독특한 양식과 분위기를 자랑하며, 조선시대의 건축미학과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사진 [네이버 나무위키]

        [한국학 중앙 연구원]

글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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