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라스트 프린세스
여러분 오늘은 영화 , 뮤지컬, 소설로 많이 알고 계시는 덕혜옹주에 관한 이야기를
포스팅해 보았습니다.
고종의 막내 딸 덕혜옹주
'덕혜'(德惠)는 1921년에 이복오빠 순종이 내려준 작호인데, 그 이전에 따로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한국 측의 기록에는 그냥 '아기씨', '복녕당 아기', 일본 측의 기록에는 姬(ひめ, 아가씨)로만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훗날 대한민국 호적에도 '이덕혜'(李德惠)가 성명으로 올라갔다. 덕혜옹주의 삶을 다룬 여러 매체에서도 '황녀 이덕혜'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고종이 59세일 때 얻은 늦둥이이자 당시 유일한 고명딸이어서, 덕혜옹주는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런 일화도 있다. 고종이 아기였던 덕혜옹주를 보기 위해 입실했을 때, 마침 유모 변복동 상궁은 누워서 덕혜옹주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변 상궁은 일어나 예를 갖추려 하였지만, 고종은 덕혜옹주가 놀라거나 울까 봐 유모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의 황제 폐하 앞에 누울 수 있는 것은 변 유모 뿐"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덕수궁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에는 '덕수궁의 꽃'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덕혜옹주가 조금 자라자 고종은 덕수궁 준명당에 황실 최초의 유치원을 만들기까지 했으며, 150m밖에 되지 않은 거리인데도 덕혜옹주가 가마를 타고 다니게 했다. 함께 다닌 원생들은 덕혜옹주와 또래인 사대부 가문의 딸들이었는데, 모두 덕혜옹주에게 극존칭을 사용했으며 항상 시중을 들 궁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이었던 것. 이 유치원의 원장은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라는 일본인이었고, 일본어로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어린 나이에도 신분 고하에 대한 이해가 빨랐던 모양이다. 외삼촌인 양 상관이 덕수궁에 입궐할 때마다 "양 상관이 온다"며 하대하고 "아기씨의 외가는 어디입니까?"라고 묻는 궁인들의 질문에 생모 귀인 양씨의 친정이 아니라 적모(嫡母) 명성황후의 친정인 죽동[10]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전통적으로 왕의 자녀는 생모가 누구이건 간에 모두 왕후의 자녀로 간주되기도 하였으므로, 덕혜옹주가 자신을 황제의 딸이라고 의식하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1925년, 한국의 황족 출신인 13세의 덕혜옹주는 무척 어린 나이에 강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황족과 화족의 영애들이 다니는 여자 가쿠슈인에 편입학하여 2년 동안의 유학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 유학 생활은 그녀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일본에서의 삶과 유학시절의 이야기
1. 가쿠슈인 유학시절
덕혜옹주가 가쿠슈인으로 떠난 1925년, 그녀는 일본으로 끌려가며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때 그녀는 황족도 아니고 화족도 아닌 애매한 신분이었지만, 가쿠슈인에서는 '토쿠에사마'라는 존칭을 받으며 특혜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 일본의 조선 황족에 대한 통제와 억압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 동안 계속해서 신경쇠약과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어머니의 사망, 아버지의 의문사, 일본 사회에서의 고립감, 독살에 대한 공포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그녀를 괴롭힌 것으로 추측됩니다.
2. 결혼과 이혼
1931년, 덕혜옹주는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였고 딸 마사코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결혼 뒤 그녀의 정신질환은 재발하였고, 부부 사이도 점점 파탄이 나게 되었습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특권을 상실한 덕혜옹주와 다케유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1946년 덕혜옹주는 남편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1955년 이혼한 후, 다케유키는 재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3. 딸 마사에(정혜)의 실종
덕혜옹주의 딸 마사에(정혜)는 어머니와 사이가 소원했지만, 어버지 다케유키의 재혼 때문에 분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56년 8월 26일 아침,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습니다. 그 후로 마사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50년 가까이 지난 후에야 그녀의 사체가 발견되어 사망이 확인되었습니다.
4. 정신병원 입원과 귀국
덕혜옹주는 정신병에 시달리면서 등교거부를 하였고, 결국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소 다케유키와 이혼하고 정신병원에 수년간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1959년, 29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한 그녀는 조선 황실의 자손으로서의 존재를 굳게 각인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5. 덕혜옹주의 죽음
덕혜옹주는 1989년 3월 16일, 77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별세하였습니다. 그녀는 일본 유학 생활에서 받은 정신적인 충격과 일제강점기의 역경을 이겨내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끊임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소중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덕혜옹주가 남긴 마지막 글씨
나는 낙선재(樂善齋)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 전하가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 나라
이구씨가 보고 싶어요
네 줄의 짤막한 글이 덕혜옹주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힘들었던 일본에서의 생활 속에 얼마나
고국이 그리웠을까 그리고 부모님을 보지 못하는 어린 덕혜옹주가 얼마나 슬프고 힘들었을지
짧은 글 속에 나타난다.
마무리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은 그녀의 삶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한국 역사의 일부로서 소중히 여겨져야 합니다. 그녀의 삶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 그리고 개인적인 용기와 강인함에 대한 영감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희생과 고통은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현재를 만들어낸 역사적인 과정의 일부이며, 우리는 그녀와 같은 희생자들을 기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출처 : 네이버 나무위키 - "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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