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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근현대(인물과 유적지)

남산을 통해 본 우리 역사

by 푸름이j 2023.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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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현재와 과거

1. 남산의 역사

남산의 역사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남산은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산으로,

높이는 해발 270.85m입니다. 남산은 조선시대 초 태조가 1394년 풍수지리에 의해

도읍지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겨온 뒤에 남쪽에 있는 산이므로 남산으로 지칭되었으며,

풍수지리상으로 안산(案山)에 해당합니다.

또한 태조는 이 산에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는 남신을 모신 국사당을

세워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산은 목멱산(木覓山)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남산은 조선시대에 신성한 산으로 추앙받았습니다.

정상에는 국사당과 함께 봉수제도의 종점인 봉수대가 있었으며,

성벽 일부가 남아 당시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2. 남산을 부르던 이름

성불산(成佛山), 인경산(仁慶山), 열경산(列慶山), 마뫼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남산은 봉수대가 있는 지역으로, 오행설(五行說)에 따른 불()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 때문에 종남산(終南山)이라고도 불렸습니다.

 

3. 일제강점기의 남산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남산의 역사와 정체성은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일제는 1908년부터 남산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고, 1916년에는 남산 전체를

공원화하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1918년에는 사대문 안 어디서든 보일 수 있도록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웠습니다.

조선신궁에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삼아 숭배하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사당과 봉수대는 인왕산으로 옮겨졌으며,

목멱산이라는 원래 이름은 사라지고, 일반적으로 부르던 이름인 남산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이름 변경은 우리 땅의 정기를 끊고 폄하하기 위한 일제의 음모였습니다.

 

남산의 현재와 과거 모습

4. 조선신궁

조선신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남산 중턱에 지은 신토 신사로,

일본의 근대사격제도에서 최고 등급의 신사였습니다. 일본의 건국신인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숭배하는 곳이었으며, 메이지 천황의 검도 보물로 간직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신궁을 통해 조선의 식민지 통치와 황민화 정책을 강화했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은 승신식을 치른 후 조선신궁을 파괴하고 불태웠습니다.

현재 조선신궁 자리에는 남산공원과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선신궁의 전체 모습과 내부 모습

 

5. 경술국치의 현장 , 통감관저 터

1) 경술국치

일제가 대한제국에게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를 공포한 경술년(1910) 829일을 일컫는 말이다.

'국권피탈(國權被奪)'이라고도 한다. 이날은 '경술년에 있었던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에서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르는데,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한일합방(韓日合邦)', '한일합병(韓日合倂)' 등의 용어를 썼다.

 

1910822,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합병조약(合倂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합병조약을 통과시켰으며, 829일 이 조약이 공포되면서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로써 1905년 을사늑약(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현재, 매년 829일을 경술국치일로 국권을 빼앗긴 아픔을 기억하며 조기를 게양하고 기념하고 있다.

 

2) 통감관저 터

조선통감부는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조선을 빼앗을 목적으로

남산자락에 설치한 총독부의 전신입니다. 1910822,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은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한일강제병합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829일 일왕과 순종의 조서가 공포됨으로써 조선왕조 519,

대한제국 14년 만에 조선은 망하게 되었습니다.

조선통감부는 그 후 조선총독부로 이름이 바뀌고, 1926년 광화문으로 옮길 때까지

그 자리에서 악랄한 식민지 정책을 펼쳤습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당시의 치욕의 역사를 지켜본 400년 넘는 두 그루의

고목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통감관저터의 과거와 현재

 

통감관저터 비석과 전경

 

 3) 하야시 곤스케

 일본의 외교관. 주한공사로 부임하여 한일의정서의 성립·한일협약 체결·을사늑약 체결 등

 한국의 국권침탈을 위한 일제의 앞잡이로 활약하였다. 그 공으로 남작이 되었으며

 이탈리아 주재 대사, 영국 주재 대사, 추밀원 고문 등을 지냈다.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일제강점기) 과 거꾸로박힌 곤스케의 동상(현재)

 

 

 , 사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경술국치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네이버 지식백과] 하야시 곤스케 [林權助(임권조)]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기억의 터 홈페이지] 통감관저 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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