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이야기/고대~조선(인물과주제)

고려에서 조선까지 최고의 공립 교육기관 -성균관

by 푸름이j 2023. 8. 26.
728x90
반응형

 성균관이야기

여러분 성균관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성균관은 KBS2TV 월화드라마성균관 스캔들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많이 알려저 있습니다. 성균관 스캔들이라는 드라마는 성균관의 유생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고 있는데요 오늘은 KBS2TV 월화드라마성균관 스캔들의 배경이 되었던

성균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성균관 명륜당

1. 성균관의 역사

성균관의 기원은 고려 시대에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려 충렬왕 24(1298)에 개경(현재의 개성)에 세워진 국자감이 성균감(成均監)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공민왕 5(1356)에는 다시 국자감으로 환원하였으나, 1362년에는 성균관으로 복구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성균관이 한양과 개성에 한 곳씩 두 개가 존립하였습니다. 한양의 성균관은 태조 4(1395)에 숭교방 부근(현재의 명륜동)에 터를 잡고 건축하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완공하였습니다. 성균관은 지사와 동지사가 있으나, 실질적으로 정삼품 대사성이 최고 책임자였습니다.

 

성균관의 이름은 주례의 대사악에 나오는 용어로, 음악을 조율하는 것과 같이 어그러짐을 바로잡고, 지나치고 모자라는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고구려 때부터 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을 가리키던 이름인 태학(太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습니다.

 

2. 성균관의 입학 자격

성균관 유생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사시와 생원시라는 과거시험에 합격해야 했습니다. 진사시는 문과의 예비시험이고, 생원시는 무과의 예비시험이었습니다. 이 두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우선적으로 성균관 입학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외에도 성균관에서 직접 실시하는 선발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書)를 통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승보는 성균관 유생의 자리가 비었을 때 보충하기 위한 시험이고, 음서는 성균관 유생의 아버지나 형제가 공적을 세운 경우에 그 자녀나 동생에게 주어지는 특혜였습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200명이었으나 유동적이었습니다. 대개 정원은 200명으로 여기에 미달하면 사학생도(私學生徒유음적자(有蔭嫡子소과초시 입격자(小科初試入格者조관(朝官) 등에서 보충하였습니다. 사학생도는 사립학교인 서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고, 유음적자는 음서를 받은 자녀나 동생들이었습니다. 소과초시 입격자는 문과와 무과의 본시인 대과(大科)에 응시하기 전에 치르는 예비시험인 소과(小科)에 합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조관은 이미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 성균관 유생들의 삶

성균관 유생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1차 과거 시험인 소과에 합격해야 했습니다. 소과는 문과와 무과로 나뉘어져 있으며, 문과는 문반(文班), 무과는 무반(武班)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문과는 문학과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시험이고, 무과는 무예와 군사를 양성하기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소과에 합격한 사람이 우선 성균관에 들어올 수 있었으며, 그 외에도 성균관에서 직접 실시하는 선발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書)를 통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승보는 성균관 유생의 자리가 비었을 때 보충하기 위한 시험이고, 음서는 성균관 유생의 아버지나 형제가 공적을 세운 경우에 그 자녀나 동생에게 주어지는 특혜였습니다.

 

성균관 유생은 성균관 안에 있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에서 먹고 자면서, 엄격한 규칙에 따라 공부하며 생활했습니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100명씩 수용할 수 있는 건물로, 동재는 동쪽에 위치하고 서재는 서쪽에 위치하였습니다. 성균관 유생은 나라의 정책이나 쟁점에 대해 토론하는 수업을 했으며, 이를 문제(問題)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성균관의 교수인 사성(司成)이나 대사성(大司成)이 제시하거나,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제기하였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자치회도 운영했습니다. 국가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될 경우에 자치회에서 의논해 집단 상소를 올리거나 수업 거부, 등교 거부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성균관 유생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자치회는 재회(齋會)라고 부르며, 장의(掌議색장(色掌) 등의 회장과 간부진을 두었습니다. 장의는 재회를 절대적으로 선도하며 학령을 어긴 유생을 문책하여 출재(黜齋퇴학)할 권한을 가졌습니다. 색장은 재회의 회계와 물품 관리를 담당하였습니다.

 

나라에서는 성균관 유생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땅과 농사지을 노비까지 제공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나라로부터 매년 1000결의 쌀과 1000돈의 돈을 받았으며, 성균관 주변에 있는 100여 개의 마을에서 세금을 면제받았습니다. 또한 성균관 유생들은 왕의 은혜로서 제주도에서 올라온 귤 같은 귀한 진상품을 나누어 받기도 했습니다.

 

4. 일제강점기의 성균관

1910년 한국을 합병한 일제는 1911년 경학원 규정을 두어 성균관에 경학원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성균관은 수백년 유지해오던 교육기능을 상실당하게 되었고, 경학원은 일제의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경학을 강구하고 문묘에 제사지내며 재산을 관리하는 일만 맡게 되었다. 1922년 사소한 개정으로 석전을 기하여 강연을 하는 것과 지방 향교에 강사를 파견하여 순회 강연을 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여전히 교육기능은 크게 제한되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자 존경각의 고서들 중 3만여 권이 경성제대 도서관으로 강제 이관되었다. 강제 이관된 고서는 해방 후에 다시 환수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5. 성균관의 과거와 현재

 

태학계첩에 나온 성균관 배치도

 

 

현재의 성균관 안내도

 

 

 

6.성균관 유생들의 삶을 다룬 드라마

KBS2TV 월화드라마성균관 스캔들이 대표적인데요 이 드라마는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라는 소설로 출판되어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역사와 문화를 쉽게 접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드라마 포스터와 도서사진

 

 

사진, 글 출처
위키디피아 [ 성균관의 역사] /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성균관과 반촌 전시도록[ 태학계첩- 성균관 지도]
네이버 지식백과 [ 성균관] /  KBS2TV 홈페이지 성균관스캔들 드라마 포스터

두산백과 [ 성균관 배치도]/   한국학 중앙영구원 [ 성균관 명륜당 사진]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