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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근현대(인물과 유적지)

제중원 설립 : 역사적 우연인가 필연인가?

by 푸름이j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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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이미지
제중원 일러스트

 

 

 최초의 서양식 병원의 설립, 제중원

 

 

옛 제중원 사진

 

 

1. 서양 근대 의학의 수용 배경

19세기 실학자들의 서양 의학 관심

부산 제생의원, 서울 일본공사관의원 등 서양식 병원 등장

지석영의 종두 시술 성공

고종과 조선 정부의 능동적 추진

 

 

2. 제중원 설립이야기

 

제중원의 역사 일러스트
제중원의 역사

 

 

18854, 고종과 조선 정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산하에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 설립

명칭: 광혜원 제중원 (학계에서 사용)

위치: 홍영식 집 (현 서울시 종로구 헌법재판소 자리) 구리개 (현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자리)

 

18854월 고종과 조선 정부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지금의 외교통상부) 산하에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당연히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병원 명칭을 지어 고종의 재가를 받았는데, 그 명칭은 광혜원(廣惠院)’이었다. 그러나 고종과 조선 정부는 2주일 만에 이를 무효화하고 제중원(濟衆院)’이라 새로 명명했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고 제중원이라 부른다.

 

고종과 조선 정부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역적이 되어버린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의 집(관행상 국가 재산이 되어 있었음,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헌법재판소 자리)을 제중원 부지와 건물로 사용하도록 했다. 홍영식의 집은 넓은 한옥이었기 때문에 진찰실, 수술실, 입원실, 대기실 등 기본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제중원 진료가 시작되어 환자들이 늘어나자, 고종과 조선 정부는 188610~11월경 제중원을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옮겼다.

 

고종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督辦, 지금의 장관)이나 협판(協辦, 지금의 차관)에게 병원장 격인 제중원 당상(堂上)을 겸임시켰다. 그래서 온건개화파의 대표적 인사인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을 시작으로 민종묵(閔種黙, 1835~1916), 남정철(南廷哲, 1840~1916) 등 외무관료들이 제중원 운영을 총괄 지휘했다. 외국어에 능숙하고 서양 정세에 밝은 젊은 관리들은 제중원 주사(主事)로 발령받아 일했다. 특히 제중원 초창기에는 우리나라 최초 국립 영어 교육기관인 동문학(同文學)의 우수한 학생들이 배치되었는데, 고종과 조선 정부가 제중원에 거는 기대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아직 서양 의술을 갖춘 의사가 없었다.

 

 

3. 제중원 운영

병원장: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협판 겸임

의료진: 알렌, 스크랜턴, 헤론, 하디, 빈튼, 에비슨 등 선교사 겸 의사

환자: 1년 동안 1460(일반 백성, 양반, 여성 포함)

질환: 말라리아, 소화불량, 피부병, 성병, 결핵, 나병, 기생충병, 각기병 등

수술: 1년 동안 150(/다리 절단, 괴사병 대퇴골 절제, 척추골 수술, 백내장 수술 등)

 

 

4. 제중원 의학당 설립

1886329, 한국 최초의 의과대학 설립

운영: 조선 정부

교육: 영어, 물리, 화학, 해부, 의료기구 다루는 법, 약 조제법, 환자 간호법 등

학생: 16명 선발, 12명 본과 진출

1890년 무렵 의학교육 중단, 졸업생 배출 실패

 

 

5. 제중원 운영권 이관

1894,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1894723, 일본군 경복궁 점령

제중원 운영권: 고종과 조선 정부, 미국 북장로회에 이관

에비슨: 제중원 운영 1904년 세브란스병원 설립

1905, 대한제국 정부, 제중원 땅/건물 되찾음

 

 

6. 제중원의 역사적 의의

한국 근현대 의료사, 특히 서양식 의료사의 출발점

서양의학 도입의 능동적 추진

대한제국 정부의 의학교와 광제원, 세브란스병원 발전에 기여

 

 

7.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간의 정통성 논란

 

복원된 제중원 사진
연세 역사의 뜰 제중원(복원) 사진

 

 

서울대학교병원과 연세의료원 사이에서 현재 제중원의 정통성에 관한 논란이 있다. 제중원이 한국 현대 의학의 발상지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인 점도 논란에 한몫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과만 보면 2011~2012년 세브란스에서 서울대 쪽에서 내민 증거를 모두 반박하고 추가자료가 발견되면서, 제중원은 세브란스의 전신이라는 결론을 지으며 논란이 마무리되었다.연세대 측에서는 제중원의 설립년도인 1885년을 대학 설립년도로 기념하고 있는 만큼, 정통성 논란은 예민한 문제이기에 적극적으로 서울대의 주장에 반박하는 모습을 보인다.

짧은 문답식으로 풀어보는 제중원의 진실
Q. 알렌이 제중원을 설립했다는 주장은 사실인가요?
A.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1884 12 4일 갑신정변 발발 당시 일본인을 제외하면 조선에 거주하던 유일한 양의(洋醫)였습니다. 그는 갑신정변 때 큰 부상을 입은 정계의 실력자 민영익을 치료했습니다. 그로 인해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서양식 국립병원의 설립을 편지로 건의했습니다. 이렇듯이 알렌이 제중원 개원에 기여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이미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양의료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 알렌의 건의가 도움이 된 것입니다.


Q.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맞는지요?
A. 자의적인 역사인식입니다. 제중원 의료진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동함으로써 제중원 운영이라는 경험적 자산이 세브란스병원에 전수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세브란스병원이 직접적으로 제중원을 계승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국립병원 제중원을 수탁 운영하던 사람들이 자금을 마련하여 1904년에 자기네 병원을 완공하고 독립한 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병원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대한제국의 요청으로 제중원을 반환했습니다. 그러고는 세브란스병원이라는 새 공식 명칭과 제중원이라는 종전 근무지의 명칭을 병용(倂用)한 경우입니다. “제중원의 브랜드 가치를 이용하여 세브란스병원과 선교사업을 활성화하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연세대학교 측은 서울대학교가 1946년 개교 당시 일제가 설립한 학교들의 연속이 아닌 새로 출발하는 대학으로 시작하였고, 그래서 1954년에는 세브란스의대 70주년 축하 광고까지 보내주다가 1978년부터 갑자기 국가 중앙 병원으로써 가치를 되찾기 위해 과거를 거슬러 대한제국의 의료기관인 제중원과 일제가 설립한 대한의원을 자대의 역사에 편입하며 기원으로 삼고 있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서울대학교 측은 제국대학의 정체성을 계승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분명 종합대학교로서 서울대는 1946년 개교를 연혁의 시작으로 삼고 있지만, 단과대 별로는 그 시작점을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가령 법과대학 측은 1895년 세워진 법관양성소를 기원으로 잡고 있고, 사범대학은 1895년 한성사범학교를 기원으로 별도로 자리잡고 있다가 국립 서울대학교로 모여졌다고 설명하고 있는 식이다.# 의과대학 측도 대한의원 교육부-경성제대 의학부를 거쳐서 1946년 서울대학교로 편입되었다는 것이 공식 입장인 만큼, 서울대가 경성제대의 정체성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의 정통성이 이어지지 않았다는 연세의료원 측의 반박도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연세대학교의 공식적인 입장
Q. 서울대병원은 어떤 근거로 제중원이 자신들의 뿌리라고 주장하는가?
A. 서울대병원과 제중원의 연속성을 말해주는 사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서울대병원은 제중원의 시작이 조선의 정부기관이므로 '국립'병원의 맥을 잇고 있다는 논리만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는 서울대병원과 제중원 간의 연속성을 보장해주지 않는 논리이다. 국립기관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제중원과의 연관성을 주장한다면, 동일한 국립인 경북대학교, 부산대학교 등 국립대에 속한 의과대학 모두가 제중원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Q. 제중원과 세브란스의 연속성을 말해주는 자료는 무엇인가?
A. 서울대병원 측은 제중원 운영권이 선교부로 넘어온 1894년 이후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전하는 1904년까지도 제중원이 조선정부 소유라고 주장하며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은 무관한 기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의 연속성을 말해주는 자료는 무수히 많다. 세브란스병원, 조선정부, 민간, 일본정부 등의 자료들이 모두 그렇다. 먼저 1902년 세브란스 병원 정초식 초청장에는 새로 짓는 제중원(세브란스 씨 기념병원)”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1906 6 4일자 관보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세브란스 병원을 제중원이라 부르며 제중원 찬성금 3000원을 지급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당시 정부가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의 연속성을 인정한 것이다.  1922 12 1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세브란스 병원을 제중원으로 부르고 있다. 일본 후생성이 발행하는 일본의적록(1925) 역시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세브란스의 내부 자료에서는 예외 없이 제중원을 세브란스의 기원으로 표기해왔다.

 

마무리

제중원 설립은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당시 조선 사회의 서양 근대 의학 수용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제중원은 한국 근대 의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역사적 의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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