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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와 대조영 이야기 -1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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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와 대조영 이야기 -1부-

푸름이j 2024. 2. 23.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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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조영,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한 나라 발해를 건국하다

 

 

1.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고왕)

 

대조영
고왕 대조영 표준영정 대조영의 후손인 태씨 집성촌에 남아있는 태씨 남성들의 얼굴을 조사한 다음 공통적인 특징을 모아서 그린 그림이다.

 

 

본명은 대조영(大祚榮)이다. 고구려 유민으로서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영주(營州) 지방에 그 일족과 함께 옮겨 와 거주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696년이진충(李盡忠) · 손만영(孫萬榮) 등이 이끄는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 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진국공(震國公),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해 당나라의 세력 아래 다시 복속시키고자 했으나 그들은 거부하였다. 당나라는 거란군을 격파한 뒤, 성력연간(聖曆年間, 698699)에 추격군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에 항복한 거란족 출신의 장군 이해고(李楷固)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가 공격해 오자, 걸사비우의 말갈족 집단이 먼저 교전했으나 대패하였다.

 

그러자 대조영은 휘하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나라 군사의 예봉을 피해 동으로 달아나면서, 한편으로 흩어진 걸사비우 예하의 말갈족 등을 규합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추격해 오자, 대조영은 지금의 혼하(渾河)와 휘발하(輝發河)의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에서 그들을 맞아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그 뒤 계속 동부 만주 쪽으로 이동해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 698년에 국호를 진(),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그러나 오대회요(五代會要)에는 손만영의 반란 때 고려 별종인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말갈인인 걸사비우가 요동으로 달아나 고구려 고지(故地)를 나누어 다스렸고, 이에 당나라는 걸걸중상에게는 진국공(震國公),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해 당나라의 세력 아래 다시 복속시키고자 했으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에 당이 이해고를 출전시켜 걸사비우를 죽였는데, 이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인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까지 병합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러한 오대회요의 기록은 835년 발해에서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장건장(張建章)이 남긴 발해국기(渤海國記)에 의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9세기의 발해인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당시 대조영 휘하의 집단은 오랜 억류 생활과 계속된 이동 과정에서 겪은 시련으로, 강력한 결속력과 전투력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대조영은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그 집단을 기반으로 급속히 동부 만주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당시 그 지역은 별다른 유력한 토착 세력이 없었고, 국제적으로는 일종의 힘의 공백 지대로서 말갈족의 여러 부족들과 고구려 유민들이 각지에 산재해 있었다. 이러한 때 새로운 힘의 구심점으로 대조영 집단이 등장하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여러 부족들이 귀속해 들어왔다.

 

건국 후 곧이어 당나라와 대결하고 있던 몽고고원의 돌궐(突厥)과 국교를 맺고 신라와도 통교했으며, 당나라와는 중종 때 정식으로 통교하였다. 당나라는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는데, 그 때부터 발해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3. 대조영에 관한기록

 

발해말갈은 본래 고려의 종족이다.
당나라 총장 연간에 고종이 고려를 평정하고 그 무리들을 중국에 흩어져 살게 하면서 요() 바깥에 두었으며
평양에는 안동 도호부를 두어 통솔하였다.
만세통천 중에 거란 이만영이 반란하여 영부를 함락시켰는데, 고려의 별종인 대사리 걸걸중상이 있었다.
걸걸중상은 말갈의 반역자 걸사비우의 무리와 함께 요동을 지키면서 고려의 땅을 나누어 왕 노릇을 하였다.
측천이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대사리 걸걸중상을 진국공에 봉하였는데, 걸사비우가 거절하였다.
측천이 장군 이해고로 하여금 진을 무너뜨리고 참수하게 하였다.
걸걸중상이 죽자 그 아들 대조영이 이어 즉위하고 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였다.
승병 정호(勝兵丁戶) 40여만이었으니 등이 읍루의 고지에 웅거하여 지켰다
오대회요 30 <발해>

 

발해말갈(渤海靺鞨)의 대조영(大祚榮)은 본래 고려(高麗)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가족을 데리고 영주(營州)로 이주했다.
만세통천년에 거란(契丹)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則天)는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군대를 이끌고 그 잔당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여, 먼저 걸사비우를 물리쳐 목을 베고, 이어서 대조영을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모아서 이해고에 대항하자 무후가 보낸 병력(王師)[15]은 대패했고, 이해고는 겨우 탈출해서 돌아왔다. 때마침 거란과 해()가 모두 돌궐(突厥)에 항복해서 도로가 막히게 되어 측천무후가 토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조영이 자기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의 계루부가 있던 땅을 차지하여 동모산을 근거지로 삼아 성을 쌓고 그곳에 살게 되었다.
대조영은 용맹하고 용병에 뛰어났기 때문에 말갈 무리 및 고구려 유민이 점점 모여들었다. 성력(聖曆, 698699) 중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이 되었고 사신을 보내서 돌궐과 연락했다.
영토는 영주에서 동쪽으로 2천 리에 있었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맞닿았다. 월희말갈(越熹靺鞨) 동북쪽으로 흑수말갈(黑水靺鞨)에 이르렀고, 영토가 사방 2000리에 편제된 가구(編戶) 10여만 호, 강군(勝兵)이 수만 명이었다.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거의 같았으며, 제법 문자를 쓰고 기록을 할 줄 안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705)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을 보내 그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대조영이 아들을 황제에게 보내자(入侍), 책립을 내리려고 했지만 거란과 돌궐이 함께 계속해서 변경을 약탈하는 바람에 명을 받든 사신이 도달하지 못했다. 예종(睿宗) 선천(先天) 2(713)에 낭장(郎將) 최흔(崔昕)을 보내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고 다스리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만들어 홀한주도독(都督)의 벼슬을 추가하자, 그때부터 매해 조공 사절을 보내게 되었다.
개원(開元) 7(719)에 대조영이 죽자 현종(玄宗)이 조문 사절을 보냈다. 또한 그 맏아들 계루군왕(桂婁郡王) 대무예(大武藝)로 하여금 아버지 뒤를 잇게 해서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책립했다.

구당서 212  <열전> 149 -북적-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붙은 이들이며 성은 대 씨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읍루(挹婁)의 동모산을 차지했는데, 영토는 영주로부터 동쪽으로 2,000리에 위치했고 남쪽으로 신라에 대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하였으며, 동쪽은 먼 바다, 서쪽은 거란이었다. 성곽을 쌓아 그곳에 살게 되자 고구려 유민이 점점 모여들었다.

만세통천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이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서 요수(遼水)를 건넜는데,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차지하고 오루하(奧婁河)를 막아 성벽을 쌓아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측천무후[武后]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고 그 죄를 사면했다. 걸사비우가 명령을 받지 않자 측천무후가 옥금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中郎將) 삭구(索仇)에게 조서를 내리니, 공격해서 목을 베었다. 그때 걸걸중상이 죽고 그 아들 대조영이 잔당을 이끌고 달아나자, 이해고가 추격해서 천문령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군대로써 이해고에게 대항하자, 이해고는 패해서 돌아왔다. 그때 거란이 돌궐에 붙어 길이 막히게 되어서 당군이 토벌할 수 없었다.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하더니, 아득히 먼 것을 믿고 건국해서 스스로 진국 왕이라 일컬으며 사신을 보내서 돌궐과 교류했는데, 영토가 사방 5,000리에 가구가 10여만 호, 강군이 수만 명이었다. 제법 글을 쓸 줄 알았고,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등 해북(海北)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

중종 때 시어사 장행급을 사신으로 보내서 회유하자, 대조영이 아들을 황제에게 보냈다. 예종 선천 중에 사신을 보내서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의 벼슬을 내리고 다스리는 지역을 홀한주로 만들어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그때 처음으로 말갈이란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 칭하게 되었다.

현종 개원 7년 대조영이 죽자 그 나라가 사사로이 시호를 고왕(高王)이라고 했다.

《신당서 권219 <열전> 144 북적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부르며 고구려의 별종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사람들을 이주시켜 중국에 흩어져 살게 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그들을 통치하였다.

측천무후 때에 거란이 북쪽 변방을 공격하자, 고구려의 별종인 대걸걸중상이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임금 노릇을 하니, 무후가 장수를 파견하여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죽였고, 걸걸중상은 병들어 죽었다. 중상의 아들 조영이 즉위하여 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였는데, 그 무리는 40만 명으로서 읍루에 웅거하며 당의 신하가 되었다.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홀한주를 설치하여 조영을 도독으로 삼고, 발해군왕에 책봉하니, 그 후세에 마침내 발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귀족의 성은 대씨이다. 개평 원년(907)부터 국왕 대인선이 사신을 파견해와, 현덕(顯德) 연간이 끝날 때까지 항상 와서 조공하였다. 나라의 토산물은 고구려와 같았다.

인선(諲譔)의 세차(世次)와 즉위년(即位年졸년(卒年) 등은 사관이 그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

《신오대사 권74 <사이부록> 제3

 

3. 발해의 영토

 

발해의 영토 지도

 

발해는 698년부터 926년까지 약 229년간 존속했던 고대 왕국입니다. 당시 발해의 영토는 매우 광활했으며, 현재의 러시아 연해주, 중국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일부 지역을 포함했습니다.

 

3.1 발해 영토의 특징

북쪽: 흑룡강

동쪽: 연해주

서쪽: 요동

남쪽: 한반도 북부 (신라와 국경 접함)

 

3.2 발해 영토의 변화

초기: 송화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

전성기: 선왕 시대, 만주의 대부분과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며 '해동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번영

후기: 9세기 후반부터 내부 분쟁과 외부 침략으로 영토 감소

멸망: 926년 거란의 공격으로 멸망

 

3.3 발해 영토의 중요성

발해는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습니다.

발해는 주변 국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문화, 경제, 정치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발해는 동북아시아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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