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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이야기

바이킹, 강력한 전투력과 뛰어난 항해술로 북유럽을 휩쓸다

푸름이j 2024. 3. 1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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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 롱스킵, 인트로
일반적인 바이킹 이미지의 롱스킵, 나무위키

 

 바이킹, 강력한 북유럽의 침략자

이번 포스팅은 바이킹이라 불렀던  스칸디나반도의   8세기-11세기 배를 타고 무역이나 약탈로 살아가던

북게르만계 노르드인들의 삶과 강력한 군사력, 뛰어난 항해술로 북유럽을 침략했던 이야기와 그들의 사회

구조, 활동과 역사이야기를 엿보는 귀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1. 바이킹의 기원

시대: 8세기 후반부터 11세기 후반
출신: 스칸디나비아 반도 (현재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유래: 인구 증가, 경제적 어려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남

2. 바이킹의 사회구조와 계급

 바이킹들의 사회 계급

계급도 이미지
바이킹시대의 사회 계급, 위키백과

 

바이킹 사회는 크게 세 계급으로 나뉘어졌는데, 엘리트 계급인 야를(Jarl)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유민인 카를(Karl), 
사회 밑바닥인 스렐(Thrail)로 분류할 수 있었다. 자유민들은 무기를 휴대할 권리가 있었고 

의회인 '씽'에서 발언권도 있었으며 투표권도 있었다. 
자유민 대다수는 농부였고 자영농도 소작농도 다양하게 섞여있었다.

우리가 흔히 '바이킹'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전사들은 다 자유민 계급이었다

마을재현도
바이킹 마을 재현도, 나무위키

 

가옥재현도
바이킹 가옥 내부 재현도, 나무위키

 

사회 구조: 씨족 기반 사회

직업: 뛰어난 선원, 숙련된 전사, 능숙한 장인
종교: 다신교, 오딘, 토르, 프리그 등 다양한 신을 숭배

 

3. 바이킹 활동

탐험: 유럽 전역, 북미, 지중해, 러시아까지 탐험
약탈: 유럽의 수도원, 교회, 도시를 공격하여 부를 약탈
정복: 일부 지역을 정복하고 지배
교역: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로를 개척
정착: 새로운 땅에 정착하고 새로운 사회를 형성

4. 바이킹 역사

4.1 시대 구분:
초기 바이킹 시대 (793년 ~ 9세기 후반): 탐험과 약탈에 집중
중기 바이킹 시대 (9세기 후반 ~ 10세기 후반): 정착과 정복에 집중
후기 바이킹 시대 (10세기 후반 ~ 11세기 후반): 기독교 전파, 봉건제 발달, 바이킹 문화의 변화

4.2 주요 사건:
793년: 영국 린디스판 수도원 공격 (바이킹 시대 시작)
871년: 잉글랜드 왕 알프레드 대왕, 바이킹과 웨드모어 조약 체결
911년: 프랑스 왕 샤를 3세, 노르망디 공국 설립
1066년: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 (바이킹 시대 종료)

 

5. 바이킹의 영향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문화, 기술, 정치 체제
현대 스칸디나비아 문화의 기초
다양한 문학, 영화, 게임의 소재

6. 뛰어난 전투력과 무자비한 공격

강인한 체격과 숙련된 전투 기술: 바이킹은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강인한 체격과 뛰어난 
전투 기술을 갖추었습니다. 특히 도끼와 검술에 능했으며, 무자비한 공격으로 적들을 공포에 몰아넣었습니다.
뛰어난 전략과 조직력: 바이킹은 기습 공격, 유격전, 포위 공격 등 다양한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뛰어난 조직력을 바탕으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무서운 용맹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음: 바이킹은 오딘 신을 믿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용맹함은 전투에서 큰 무기가 되었으며, 적들에게 압박감을 주었습니다.

 

7. 탁월한 항해술과 탐험 정신

 

발달된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 바이킹은 뛰어난 조선 기술을 바탕으로 빠르고 견고한 배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별과 해류를 이용한 뛰어난 항해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넓은 탐험 범위: 바이킹은 유럽 전역뿐만 아니라 북미, 지중해, 러시아까지 넓은 지역을 탐험했습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고 새로운 땅을 발견했습니다.

 

뛰어난 적응력: 바이킹은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적응력은 낯선
 땅에서도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8. 약탈과 정복, 그리고 정착

수도원과 교회 공격: 바이킹은 유럽의 수도원과 교회를 공격하여 많은 부를 약탈했습니다. 이러한 공격은 유럽 
사회에 큰 공포를 안겨주었습니다.
정복과 지배: 바이킹은 일부 지역을 정복하고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잉글랜드의 일부 지역과 프랑스
 북부 지역은 바이킹의 지배를 받기도 했습니다.
교역과 문화 교류: 바이킹은 약탈과 정복뿐만 아니라 교역과 문화 교류에도 참여했습니다. 
이를 통해 유럽 사회에 새로운 문화와 기술을 전파했습니다.

 

바이킹들의 무역로를 나타낸 지도
바이킹들의 무역로

 

바이킹들이라고 해서 약탈만 한 것이 아니라 교역도 했다. 저멀리 중국에서부터 시작한 실크 로드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지중해까지 이어졌는데,

이렇게 흘러들어온 물산들이 다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북해까지 유입되었다. 그 누구보다 배와 바다에

친숙했던 바이킹들은 이 방대한 전세계적 무역 네트워크에 끼어들어 한 몫 단단히 차릴 수 있었다.

 

9. 바이킹 침략의 영향

유럽 사회의 변화: 바이킹 침략은 유럽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많은 지역이 파괴되고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습니다. 
또한, 기존의 정치 체제가 변화하고 새로운 왕국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문화 교류와 발전: 바이킹 침략은 유럽 사회의 문화 교류와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이킹의 문화와 기술이
 유럽 사회에 전파되고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10. 바이킹의 함선

10.1 바이킹의 다목적선박 랑스킵과 크노르

바이킹 함선의 이미지
바이킹의 함선 이미지, 나무위키

 

바이킹의 배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탐험, 무역, 전투 등의 다목적 선박인 랑스킵(Langskip)과 무역, 수송 및 대서양 항해에 특화된 크노르(Knǫrr)이다. 우리가 흔히 '바이킹 배'하면 생각나는 뱀머리 장식과 거대한 돛, 방패가 옆면에 주렁주렁 달린 배는 대부분 '랑스킵'에 해당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랑스킵의 경우, 재질이 가볍고 선체가 안정적이어서 기동성이 당대의 다른 배들보다 우월했다. 흘수가 굉장히 얕아서 심지어 수심 1m의 바다에서 항해가 가능할 정도였다. 그랬기에 해안가 바로 앞까지 바이킹들을 빠르게 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상륙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으니 약탈한 뒤 빠르게 치고 빠지는 데는 아주 그만이었다. 약탈이라는게 속도가 생명이라 항속도 당시치고는 굉장히 빠른 편에 속했는데, 보통 시속 9km~19km 안쪽에 있었고 바람만 잘 불어준다면 15노트, 즉 시속 28km까지도 낼 수 있었다.

랑스킵은 앞뒤가 완벽히 대칭이었다. 그래서 굳이 뱃머리를 돌릴 필요도 없이 노젓는 방향만 바꾸면 배의 방향을 쉽게 뒤집을 수 있었다. 또한 추진력을 최대한 내기 위해서 뱃전 거의 전체에 노를 빽빽하게 깔았다. 돛대를 여러 개 설치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그럴 공간조차 없었기에 웬만한 랑스킵은 단일 돛대에 거대한 직사각형의 돛을 달았다. 이 돛은 특히 장거리 항해 도중 노젓는 사람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순풍이 불어 바람이 대신 배를 밀어줄 때는 노잡이들이 잠시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킹들의 랑스킵은 일정한 규격이 있거나 형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건조하는 지방에 따라서 돛대의 형식, 선체의 모양, 나무 재질도 죄다 달랐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정말 기본적인 틀은 존재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 틀에 기반해서 랑스킵을 대략 네 가지로 분류한다.

10. 2 고고학자들이 분류한 네가지의 랑스킵

 

첫번째 ,카르베스(Karves, 또는 Karvi)

넓은 선체를 가진 작은 유형의 긴 배로, 바다를 항해하는 나룻배와 다소 유사합니다.카르베는 전쟁과 일반 수송에 사용되어 사람, 물건, 가축을 운반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얕은 물에서 항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안을 따라가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카르베스는 약 5m(17피트)의 넓은 들보를 가지고 있었고, 길이는 최대 21m(70피트)였으며,

최대 16개의 노를 허용했습니다.

 

 

두 번째로 작은 랑스킵인데 보통 본격적인 전쟁에 투입되는 건 스네크야급 함선부터였다.

최소 20열의 노잡이용 좌석이 있었고 일반적으로 길이 17m, 너비 2.5m, 흘수가 0.5m였다. 승무원은 대략 41명으로, 노잡이 40명과 지휘관 1명으로 구성되었다. 가장 흔한 유형의 랑스킵이기도 해서, 북해 제국을 건설한 크누트 대왕은 전투 한 번 나가는데 무려 1,200여 척의 스네크야를 동원했고, 대부분의 바이킹들은 이걸 타고 약탈을 나갔다

 

 

네 번째이자 가장 유명한 게 바로 드라카르이다. 뱃머리에 용이나 뱀의 머리를 달고 다니는 랑스킵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바로 이 드라카르의 모습이다. 가장 독특하게 생겼고 화려하며 크기도 압도적으로 컸는데, 최소한 30열 이상의 좌석을 가졌고 훨씬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드라카르를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10세기 경 헤럴드 페어헤어가 소유했던 드라카르였고, 가장 유명한 드라카르는 노르웨이 국왕 올라프 1세가 건조한 거대한 드라카르였다.

 

 

바이킹들의 무역선이었던 크노르는 랑스킵보다 더 폭이 넓고 깊었으며 길이는 약간 작았다. 화물 운송이 주목적이라 적재 화물량은 최대로, 승무원의 수는 랑스킵보다 적었다. 일반적인 크노르는 길이 약 16m, 폭 5m으로 1척이 약 24톤에 달하는 화물을 적재 가능했다. 주 수송품은 바다코끼리 상아, 양모, 목재, 모피, 갑옷, 노예, 밀, 꿀 및 무기 등이었다. 빈란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교역로의 장거리 루트도 항해할 수 있을만큼 선체가 안정적이었고 브리튼 제도, 유럽 대륙, 중동의 교역소까지 운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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